비급전관

by 김준식
비급전관 지본 담채 121.5×82.5cm

秘笈展觀(비급전관) - 비급을 펼쳐보이다.


김명국(1600년~1662 이후로 추정)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이다.


화가 김명국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이 끝난 황폐한 조선의 미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은 조선 민중의 삶을 바닥까지 추락시켜 회복 할 수 없게 만든 전대 미문의 대 재앙이었다. 이미 전란 이전부터 지배계급은 저들의 욕심과 명분을 위해 민중에게 등을 돌렸는데 전란이 나자마자 황망히 의주로 도망친 선조의 행동이 민중에 대한 지배계급의 태도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일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민중들은 그야 말로 무방비 상태에서 거의 7년 동안 일본군의 총검에 이리 저리 몰려 다니는 처참한 신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초반부터 조선을 도와 준다는 명분으로 개입한 명나라 군대의 노략질 또한 엄청나, 명군이 주둔했던 기간 동안 조선의 민중들은 처참하게 유린되고 말았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불우한 형편에서 자란 김명국의 생각은 현재 남아있는 몇 점의 그림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비현실적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는 술을 좋아하고 호방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그는 그의 그림으로 전란으로 피폐된 민중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인데, 바로 이 그림이 작은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범상치 않은 모습의 두 노인이 마주 보고 아주 심각하게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펼쳐놓은 두루마리에 있는 글귀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매우 중요한 뭔가가 적혀 있음이 틀림없다.


김명국은 그의 대표작 ‘달마도’에서 알 수 있듯이 감필법의 달인이다. 감필법이란 단 몇 번의 붓질로 형체를 그려내는 그야말로 달인의 경지에 올라야 가능한 운필법이다. 평소 술을 즐겼던 김명국은 술을 마시고 명정상태에서 노인의 옷을 몇 번의 붓질로 그렸다. 그런가 하면 얼굴과 수염은 상대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그림으로써 절묘한 대비를 통해 신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배경이 되고 있는 잎이 떨어진 매화나무는 또 다른 감필의 놀라운 표현능력을 보여준다. 가지 끝은 마치 낙서를 하듯 휘리릭 빠르게 그려놓았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바닥에는 또 다른 비급이 말려져 있고 긴 낚싯대가 놓여있는데 이 또한 날렵하고 간결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도교라는 종교는 매우 신비적인 경향이 강하다. 신비주의는 결국 합리와 이성을 기초로 하지 않고 인간들의 덧없는 욕망과 그로부터 만들어진 상상, 그리고 실현불가능 것들(영생 혹은 장수, 공중부양 등)을 얼버무려 놓은 것인데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사를 등한시 하게하고 삶의 의욕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완전히 부정적인 경향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임진왜란 후의 험한 세상에 상처받은 민중들의 먹먹하고 굳은 마음을 약간의 기대와 상상으로 부드럽게 하는 긍정적인 기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시대가 불투명해질수록 이러한 신비주의는 영향력을 가지게 되고 쉽게 사람들에게 파급된다. 17세기는 임란 후 조선 정부의 객관적 상황에서 본다면 이런 그림이 그려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치 후한 말 어지러운 시기에 도교라는 종교가 체계화된 것처럼 조선의 17세기는 혼란스럽고 백성이 정 붙일 곳이라고는 이러한 신비로운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그 느낌과 생각을 화가 김명국은 이 그림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의 민중들 또한 별로 달라진 것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은 화보집을 스캔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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