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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02. 2018

Elysium

2013년 영화 엘리시움


이분법의 해체와 몰락에 대한 묵시록 


권력과 자본


쉽게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흑백, 좌우, 상하, 빈부와 같은 이분법이다. 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이렇게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어떻게 보면 이분법은 가끔은 매우 설득력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쉬운 만큼 위험부담이 크다. 그 위험 중 하나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시간이 갈수록 그 이분법 속에 자신을 가두고 그 논리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이분된 두 개의 방향에 가치를 개입시키는 것인데 즉, 단순히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개념’을 전제한 두 개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 가치 개입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논리가 숨어 있고 그것들은 다양한 형태로 이분법을 강화시킨다.

자본의 논리를 필터로 하는 이분법은 ‘빈부’가 대표적이다. 즉, 빈부의 이분법에는 자본이라는 가치개념이 녹아 들어 있는데 최근에는 여기에 권력까지 교묘하게 녹아 들어 있다. 


2013년에 개봉한 봉준호의 '설국열차'가 보여주는 이분법의 세계에서 우리는 권력과 자본의 결합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엘리시움 역시 권력과 결합한 자본의 철저한 이분법이 지배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설국열차'와 이 영화에 차이가 있다면 시 ․ 공간의 차이와 미세한 시퀀스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근간은 매우 흡사해 보인다.

지구상공에 떠 있는 엘리시움. 화려하고 안락하며 무병장수하지만 행복한 삶인지는 알 수 없다.

엘리시움


엘리시움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상향, 또는 선량한 사람들이 죽은 후 사는 곳이다.(하데스의 지하세계와 함께 사후세계 개념을 양분하고 있으며 자격을 갖춘 자는 엘리시움으로 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지하세계로 간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상향도 아니고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곳도 죽은 사람들이 사는 곳도 역시 아니다. 거기에는 극단의 이분법에 의해 분리된 부자들의 세상이며 동시에 극단의 차별이라는 무서운 논리가 깔려있는 무섭지만 겉으로는 매우 화려한 세상이다. 


2154년 지구(영화 ‘아바타’와 시공간이 같다. 우연의 일치인가?)는 폐허와 고통 속에 99%의 사람들이 가혹한 착취 속에 살고 있고 오직 1%의 사람들이 지구와 멀지 않은 우주공간에 인공적으로 만든 엘리시움이라는 곳에 사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 유일한 자격이 돈, 즉 자본의 유무인데 그 나머지 조건에 대해서는 영화적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제작사의 홍보문구에 따르면 엘리시움의 둥근 모양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반지를 모티브로 했다 하지만 뜬금없는 비유로 생각된다.

주인공 맥스가 착용한 기계장치. 한 번 부착하면 죽기 전에는 분리할 수 없다.

주인공 맥스(맷 데이먼 분)는 폐허의 지구에 사는 공장 노동자다. 한 때 범죄자였지만 이제는 성실하게 살아보려는 그에게 가혹한 시련이 다가온다. 노동자의 삶이란 시간에게 지배당하는 삶이다. 또 가혹한 노동조건과의 투쟁이며 사용자와의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다. 맥스가 당하는 일은 2018년 지금의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고 그보다 더 못한 열악한 환경에 있는 노동자도 많다.


어쨌거나 주인공 맥스는 그 처참한 노동환경 때문에 엘리시움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옵션은 기계장비의 생체부착이었다. 이러한 장비를 부착한 사람과 완전한 기계인간의 등장은 문명발달을 다소 비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감독의 입장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중요한 시퀀스로 작용하는 인간두뇌와 컴퓨터의 상호작용(생체부착 장비를 통한)은 미래세계를 보여주는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지금의 기술진보로 보아 가까운 시간 안에 이루어 질 기술로 보인다.


이기심과 욕망의 아이콘 델라코트. 이분법의 세계에 갇혀 마침내 파멸에 이른다.

이분법의 극단과 해체


엘리시움의 국방장관 델라코트(조디 포스터 분)는 엘리시움이라는 체제유지를 위해 모든 것을 감행하는 기계보다 냉혹한 존재이다. 그녀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지나온 7~80년대의 이 땅의 독재자들이 그들의 체제수호를 위해 쏟아냈던 말과 너무나 닮아 있다. 그녀가 청문회에서 파텔 대통령(이스케이프 플랜 분)을 향하여 쏘아붙이는 이야기들(선량한 소수를 위한 대다수 악을 척결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은 우리가 흔히 보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정신세계와 놀랍게도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적은 늘 내부에 있게 마련이다. 그녀가 폐허의 지구 위에 문제 해결(그녀의 노선에 방해 되는 모든 것을 처리하는)을 위해 심어 놓고 수족처럼 쓰는 존재인 크루거(샬토 코플리 분)에 의해 그녀가 그토록 유지하려 했던 철저한 이분법은 몰락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영화에서 보듯이 권력과 자본은 끝없이 자기복제를 통해 확산하려는 특징이 있고 그 수단으로서 인간들의 이기심과 욕망을 이용한다. 욕망과 이기심이 강할수록 인간들은 권력과 자본의 힘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마침내 그것들의 하수인이 되어 이성과 판단력을 잃게 되고 스스로도 파멸하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고 2018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단순함


의료기기의 혁명적 발전을 통한 엘리시움의 상황이, 영화에서 엘리시움으로 가야하는 주인공의 유일한 에너지원이다. 몹시 단순하다. 영화에서 엘리시움을 묘사하는 장면은 몇 컷이 되지 않는다. 다른 부가적인 설명도 별로 없다. 관객인 나로서는 한 번의 치료로 모든 병이 완치된다는 기계의 설정을, 엘리시움 전체를 설명하는 은유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혹은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은유가 아니고 엘리시움이 그런 기계만 있는 세상이라고 영화가 말하고 있다면 오히려 지구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몇 몇 장면에서 아직도 여전히 지구에는 인정과 사랑,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유대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오로지 많은 돈과 좋은 집, 그리고 좋은 환경, 첨단의 의료장비만으로 인생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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