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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29. 2018

장자 외편 공부 산목(1)

공자를 조롱하는 '장자'

산속의 나무가 썩었다. 그리고 거기 버섯이 피어났다. 장자의 표현대로라면 이 또한 쓸모인가? 아니면 무용한 것인가?

공자를 조롱하는 ‘장자’


孔子가 진나라와 채 나라 사이에서 포위되었을 때,


(원문 圍於陳蔡之間 위어진채지간, 노나라 애공 6년 공자는 초나라 소왕의 초청을 받고 초나라로 가게 되었다. 도중에 진나라와 채 나라 사이를 지나다가 일찍이 그 지방 사람들을 해친 일이 있는 양호(陽虎: 공자와 닮은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 간신으로 이곳저곳 백성들을 괴롭힘)로 착각되어 사람들에게 포위당하여 곤경을 겪었다. 장자 천운 편과 양왕 편에도 이 이야기가 인용되고 있다.)


이레 동안 따뜻한 밥을 지어먹지 못했다.

태공임이 가서 위로하고 이렇게 말했다.


(태공임: 太公任 인명. 태공은 신분을 나타내는 호칭. 임은 그 사람의 이름. 太자는 다른 판본에 大로 표기된 것도 있다. 李頤(이이)는 “大公은 大夫를 말한다. 任은 그 이름이다.”라고 풀이했고, 당나라의 학자 成玄英(성현영)은 “太公은 노인을 일컬음이다. 任은 이름이다.”라고 풀이했다. 한편 청나라 시대의 학자 兪樾(유월)은 태공을 複姓(복성)으로 보았는데 일본의 후쿠나가는 이 의견을 따르고 있다. 종합해보면 신분이나 위상이 대단히 높은 존재를 가상하여 만든 인물로 추정된다.)


“당신은 거의 죽을 것 같은데요?”

孔子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太公任이 말했다.

“당신은 죽는 게 싫습니까?”

孔子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太公任이 말했다.


“내가 시험 삼아 죽지 않는 이치를 말해 보리다. 동해에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을 意怠(의태-바다제비의 한 종류)라 한다오. 이 새는 돼먹기를 퍼덕퍼덕 날개를 치기만 할 뿐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아무 능력도 없는 것 같아서 다른 새들이 끌어당기면 겨우 날며, 닦달을 당하고 위협을 당하고 나서야 겨우 집에 들어가 쉬며, 나아갈 때는 남들보다 앞서지 않고, 물러날 땐 남들보다 뒤에 남지 않습니다. 밥 먹을 때에도 감히 먼저 맛보지 않고 반드시 모두가 남긴 찌꺼기를 먹습니다. 그 때문에 새의 대열에서 배척받지 않으며, 외부의 인간이 결국 해를 입히지 못하는지라 이런 까닭에 근심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곧은 나무는 먼저 베어지고 맛있는 우물은 먼저 마르게 마련이지요. 당신은 아마도 자신의 지식을 포장하여 어리석은 자들을 놀라게 하고, 자기 자신을 수양하여 그로써 다른 사람의 악행을 돋보이게 만들되, 분명하게 마치 해와 달을 치켜들고 다니듯 했기에 근심스러운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크게 도를 이룬 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적을 이룰 수 없고, 공은 이루어지고 나면 무너지게 되고 명성은 이루어지면 훼손된다.’고 했습니다. 누가 공적과 명예를 버리고 백성들에게 돌아가 함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道는 널리 세상에 퍼져 있으면서도 뚜렷하게 머물지 않고 德은 만물에 작용하면서 명성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한결같아서 미치광이에나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흔적을 없애고 권세를 버려 功名을 추구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남을 책망하지도 않고 남에게 책망을 받지도 않습니다. 至人은 명성이 소문나지 않는 법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런 것을 좋아하시오?”


공자는 “훌륭한 말입니다!”라고 하고는 교제를 사양하고 제자들을 돌려보내고 큰 연못가에 은둔하면서 가죽옷과 갈옷을 입으며 도토리를 먹고살았다. 이윽고 짐승들 속에 들어가도 무리가 흩어지지 않고, 새들 사이에 들어가도 행렬이 흩어지지 않게 되었다. 새나 짐승들도 싫어하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장자’의 자만이 하늘을 찌른다. 감히 공자를 까는 것도 모자라 공자를 아예 은둔자로 만들어버린다. ‘장자’가 공자를 비난하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다.


1. 자신의 지식을 포장하여 어리석은 자들을 놀라게 하고,

2. 자기 자신을 수양하여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악행을 돋보이게 만들었고,

3. 그러한 상황을 마치 해와 달처럼 치켜들고 다녔다는 것.


‘장자’는 공자의 잘난 체를 경멸했음이 분명하다. ‘장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지식으로 자신을 꾸며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인물의 전형이 ‘장자’ 생각에는 공자다. 그리고 공자의 수양조차도 꾸밈의 수단으로 폄하해버린다. 어지간히 꾸밈과 ‘~체’하는 것에 질린 모양이다. 질린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을 수 없이 목도했던 ‘장자’의 체험이 녹아있을지도 모른다.


21세기 대한민국, 즉 지금! ‘장자’의 이런 이야기가 몹시 낯설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자신의 지식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경쟁한다. 어리석은 자들을 얄팍한 지식으로 놀라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대단한 존재가 되고, 그것은 즉시 ‘자본’과 치환된다.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최소한 ‘장자’의 이 이야기만은 너무나 괴리감이 느껴진다. 상대의 악행을 드러내면 낼수록 자신은 더욱 선량한 인물이 되고, 자신의 잘난 모습과 선량함을 해와 달처럼 드높이면 높일수록 스스로의 명예와 위신, 그리고 자본이 증가하는 세상이 지금 대한민국이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고, 나 역시 확실하게 그러하다. 문득 ‘장자’ 공부가 무용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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