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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l 30. 2018

장자 제19편 달생(2)

장자 제19편 달생(2) 


『장자』를 읽다 보면 자주 불교의 宗旨와 비슷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장자’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분명 중국에 불교가 없었다. 하지만 그 후 불교의 전래 뒤에 『장자』의 상당부분이 추가 재편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인데 이러한 작업 중에 알게 모르게 불교적 이미지가 스며든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달생의 이야기 속에서도 불교의 이미지를 쉽게 느낄 수 있는데 달생 일곱 번째 이야기가 좋은 예다. 여러 『장자』 해석에서는 불교와 연결 짓지 않았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불교의 空사상이 짙게 느껴진다. 


불교에서는 공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사물들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자아(스스로의 의지와 그 의지의 방향)가 없다. 그것을 무아(無我 – 제법 무아의 줄임 말이다.)라고 하며, 자아(自我)가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자성(自性)이 없다라고 표현한다. 즉 실체는 자성인 셈이다. 그래서 실체가 없다는 말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 부른다. 무자성은 緣起(연기)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과연 『장자』에서 이 공 사상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보자. 


달생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제나라 환공이 사냥을 갔다가 귀신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 귀신은 환공 눈에만 보인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사냥을 마치고 온 환공은 귀신을 보았으니 헛소리를 하며 앓아 눕고 만다. 이 때 제나라의 선비(일종의 퇴마사 같은 존재) ‘황자고오’라는 사람이 와서 환공에게 그 귀신에 대한 일반론을 이야기해 준다. 이를테면 기가 허하다거나 마음의 문제라는 이야기를 한다. 환공이 이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도리어 환공은 황자고오에게 귀신의 존재에 대해 캐 묻는다. 그러자 황자고오는 10종류의 귀신을 설명하게 되는데, 환공은 마지막에 설명하는 委蛇(위사)를 자신이 보았다고 말하면서 그 귀신을 보면 어찌 되는가를 묻는다. 그러자 황자고오는 재치 있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 귀신을 보면 천하의 覇者(패자 – 지배자)가 됩니다.” 라고 고한다. 당연히 환공의 병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이야기의 핵심은 병이 난 원인도, 또 병이 낳은 원인도 모두 환공에게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달생의 방법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문제는 스스로에게 그 원인이 있으니 양생에(균형을 맞춘 삶의 태도) 힘쓰라는 이야기다.  


이와 지극히 비슷한 불교적 설화가 있다. 宋나라 승려 道彦(도언)이 지은 전등록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어떤 사냥꾼이 사냥을 떠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산에서 목이 말라 옹달샘에 물을 마실 때 가끔씩 물에 떠 있는 작은 뱀을 마실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목숨이 위태로우니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사냥꾼은 이 이야기를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사냥을 떠났다. 며칠이 지나 사냥꾼이 사냥에 몰입하다 보니 그만 이야기를 잊어버리고 옹달샘 물을 마시기 위해 몸을 낮추고 입으로 물을 마시는 중에 문득 뱀 같은 형체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뿔싸 고개를 들어 보니 물을 그만 삼키고 만 것이다. 그 일로 사냥꾼은 집으로 돌아와 시름 시름 앓게 되었는데 사냥꾼은 이 사실을 아내에게 고백한다. 사냥꾼의 아내는 용하다는 의원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온갖 약을 먹였으나 병은 깊어만 갔다.  


어느 날 사냥꾼의 집에 탁발하는 스님이 와서 사냥꾼의 아내가 시주를 하는데, 근심이 가득해 보이니 스님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아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스님이 남편인 사냥꾼에게 사냥 갔던 당시 그 옷 그대로 입고 자신을 따라 오라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냥꾼은 그 날 그 복장으로 스님을 따라 나서게 된다. 스님이 그날 물 마신 옹달샘으로 가 보자 하여 사냥꾼은 자신이 뱀을 마셨다고 의심한 그 옹달샘으로 스님과 함께 갔다. 스님이 사냥꾼에게 “그 날 물 마신 것처럼 고개를 숙여 보시오.” 그러자 사냥꾼은 그날처럼 모자를 썼는데 그 모자 위에는 꿩의 긴 깃털이 꽂혀 있었고 그 깃털 그림자가 물에 일렁이니 마치 뱀처럼 보였다. 사냥꾼이 깜짝 놀라니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 머리 위에 꽂혀있는 꿩의 깃털이 물에 비쳐 일렁이는 허상을 보고 당신은 그것이 뱀이라고 착각하고 그 뱀을 마셨다고 다시 착각한 것이오.” 당시 사냥꾼이 뱀을 마신 줄 알고 놀라 고개를 드니 깃털의 그림자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알아차린 사냥꾼은 병이 나았다. 역시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는 이야기다.  위 『장자』달생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의 두 이야기는 모두 허상을 보고 그 허상에 집착하여 생긴 병에 대한 이야기다. 그 집착은 실체 없는 것을 실체 있다고 믿고 있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체 없음, 즉 무자성의 원리인 연기를 파악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장자’ 가 이런 생각을 했을 리 없으니 불교의 영향을 받은 후대 사람들이 『장자』를 편집하면서 끼워 넣은 이야기가 분명해 보인다.     


사진은 일두 정여창 선생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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