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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12. 2016

Un coin de table, 1872.

관점의 확장, 그리고 관점의 축소

Un coin de table, 1872. Oil on canvas, 160cmⅹ225cm

예술적 지향점에 대한 견해, Henri Fantin-Latour(앙리 팡탱 라투르)의 

Un coin de table(테이블에 둘러앉아) 1872


Henri Fantin-Latour(앙리 팡탱 라투르 1836-1904)는 사실주의의 대표적 화가 Gustave Courbet(구스타프 쿠르베)의 제자로서 사실주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고, 인상파 화가들의 스승 Édouard Manet(에두아르 마네)와 함께 생활하면서 익힌 인상주의 화풍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 화가이다. 그는 정물화(靜物 ;Nature Morte – 프, Still Life – 영, Stilleben – 독)를 주로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오른쪽 끝에서부터 Paul Verlaine(폴 베를렌), Arthur Rimbaud(아르튀르 랭보), Elzéar Bonnier(엘리 지어 보니), Léon Valade(레옹 발라드), Emile Blémont(에밀 벨몽), Jean Aicard(쟝 에카르), Ernest d'Hervilly(어니스트 애브루아), Camille Pelletan(카미유 쁘레탱)의 8명인데 시인, 평론가, 정치가, 화가 등 다양한 직업 군의 사람들이 테이블 주위에 서 있다. 이 그림은 라투르가 시도한 그룹화(여러 명의 사람이 등장하면서 일련의 주제의식을 가진) 네 개의 연작 중 세 번째 그림이다. 


첫 번째는 그가 스승 쿠르베만큼 존경하는 Eugène Delacroix(들라크루와)를 위해 그린 Hommage à Delacroix(들라크루와에게 보내는 경의, 1864)이며 두 번째는 Un atelier aux Batignolles(바티뇰 작업실에서의 모임, 1870)으로서 그의 스승 Édouard Manet(마네)에 대한 헌사였다. 세 번째가 이 그림으로서 당시 파리의 저명인사(개혁적 인물)들을 그렸는데 이 모임은 Charles Baudelaire(샤를 보들레르)를 위한 모임이었다. 따라서 모인 사람들 중 2~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인이었는데 그중,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는 직접적으로 보들레르의 낭만적이며 심지어 악마주의적인 시적 이미지를 확장시킨 사람들이었다. 


네 번째, 즉 마지막 그룹화는 Autour du piano(피아노 주위에서, 1885)인데 Camille Saint-Saëns(카미유 생상)으로 추정되는 인물 주위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그림이다. 생상은 초기에 독일 출신의 대 작곡가 바그너의 지지자였기 때문에 네 번째 그림의 이름은 ‘바그너 주의자’로 불리기도 했으나 정작 피아노 위의 악보는 브람스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라투르가 그린 이 네 편의 예술가 그룹의 연작은 당시 파리의 예술적 경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그림의 인물들은 모두 특별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었는데 그림에서도 이러한 그들의 성격이 잘 묘사되고 있다. 즉, 그들은 어느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으며 (물론 화가인 라투르의 의견이겠지만) 각자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고자 애써는 모습조차 느껴진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된 각자의 옷과 모자 헤어스타일, 그리고 몇 개의 소품을 통해 우리는 그 시절 그 자리를 직접 보고 있는 것이다.   



장자 이야기


관점의 확장, 그리고 관점의 축소


장자가 조릉의 울타리 주변을 거닐다가 이상한 까치 한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날개가 일곱 자나 되고 눈이 한 치나 되었다. 그 까치는 장자의 이마에 닿았다가 밤나무 숲에 내려앉았다. 장자가 중얼거렸다. “저건 대체 무슨 새일까? 날개는 큰데 높이 날지 못하고, 눈은 크나 잘 보지 못하다니!”


그는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재빨리 걸어가서, 시위를 당겨 화살을 겨누었다. 그때 매미 한 마리가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자기를 잊은 듯 울고 있었다. 그런데 사마귀 한 마리가 커다란 앞발을 들고 그 매미를 노리고 있었다. 사마귀는 먹잇감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드러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상한 까치는 바로 이 사마귀를 잡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까치 역시 먹잇감에 정신이 팔려 자기의 참된 몸을 잊고 있었다. 


이것을 본 장자는 소스라치며,“아! 사물이란 원래 서로 연루되어 있고, 이로움과 해로움은 서로를 부르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활을 버리고 도망쳐 나왔다. 그러자 밤나무 숲의 관리인이 쫒아 나와 그를 꾸짖었다.

장자는 돌아와서 석 달 동안 뜰에도 나가지 않았다. 


제자인 인저(藺且)가 물었다. “선생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장자가 말했다.


“나는 외물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잊고 있었다. 흐린 물을 보다 보니 맑은 못을 몰라 본 것이지. 나의 스승님께서 ‘세속에 들어가면 세속을 따르게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지금 나는 조릉에서 거닐다가 나 자신을 잊었고, 이상한 까치가 내 이마에 닿자 밤나무 숲까지 따라 들어가 나의 참됨을 잊었다. 그러다 밤나무 숲의 관리로부터 모욕을 당한 것이지. 그래서 나는 두문불출하고 있는 중이다.”


조릉의 경험을 통해 장자는 고달픈 세상이 서로 연루되어 있다는 깨달음에서 더 나아가 이로움과 해로움은 서로를 불러들인다는 인식을 한 것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의 이면이 되는 이해의 이치를 가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석 달 동안 고민한 장자는 자신의 참모습을 지키기 위해 어떤 생각을 하고 세상으로 나아갔을까? 


장자는 일상의 작은 경험 속에서 전체를 보는 통찰력을 얻은 셈인데, 이는 자신의 시각과 주장을 버리고 다른 사물들을 찬찬히 관찰한 후 나와 사물이 일치가 되는 우주적 통찰력까지 얻게 된 것이다. 


장자 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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