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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15. 2016

La Pie,1868~9.

호접몽

La Pie,1868-69. Oil on canvas, 89cmⅹ130cm

눈 내린 풍경에 대한 인상주의적 해석, 

Oscar-ClaudeMonet(오스카-끌로드 모네)의 La Pie(까치) 1868-69


위대한 천재 Johann Wolfgang von Goethe(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수많은 저작 중에 Zur Farbenlehre(색채론)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당시까지 거의 불변의 정설로 믿어왔던 또한 명이 위대한 천재 Isaac Newton(아이작 뉴턴)이 쓴 A New Theory of Vision(색채이론)의 내용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괴테가 해석하는 색채는 뉴턴이 설명한 빛의 반사라는 단순한 과학적 지식에서 진보하여 그 반사된 빛(색채)이 가지는 속성에 대하여 괴테의 방식대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괴테의 색채 이론은 과학적으로도 뉴턴과는 상이한 견해를 피력하였을 뿐 아니라, 색채라는 것을 독립적 인대상으로 하고 거기에 형이상학적 잠재성을 부여하여 괴테 이후 많은 서양화가들이 색채를 통해 그들의 내면을 드러낼 단서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초기 인상주의 화가로 불려지는 Oscar-Claude Monet(오스카 끌로드 모네 1840~1926)가 그의 후원자 Louis Joachim Gaudibert(루이 요하킴 고디베르)의 초청으로 노르망디의 에트르타에서 한 동안 지낼 무렵, 눈 내린 풍경을 제법 많이 그렸는데 이 그림도 그중 하나였다. 눈 내린 나무 담(Wattle Fence - 당시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전통가옥들은 대부분 나무로 된 담벼락을 사용하였다.) 사이 다섯 개의 나무로 만든 문 위에 까치가 앉아 있다. 


눈 내린 뒤 희미하게 비치는 햇빛 때문에 담 그늘은 옅은 푸른빛으로 반사된다. 이 장면을 보는 우리는, 이 기막힌 장면 속에서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관념적 세계를 느낄 수 있다. 괴테의 색채론에 의하면 색채란 ‘빛과 눈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는데 그림에서 눈밭의 응달을 묘사한 저 오묘한 빛을 설명함에 있어 괴테의 색채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화가 스스로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특정한 색채를 혼합하여 그림을 그렸으나 그 그림을 보는 우리는 뭐라 특정할 수 없는 색채, 이를테면 회색, 청색으로 지칭될 수 없는 오묘한 색채로 느껴지는데, 이것은 그림에서 칠해져서 반사된 빛과 관람자의 눈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색채로 거듭났기 때문일 것이다.   


모네의 풍경화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은 Johan Barthold Jongkind(용킨트)였지만 ‘눈 내린 풍경’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상황에 있어서 영향을 준 사람은 Gustave Courbet(구스타브 꾸르베)였다. 꾸르베의 영향을 받아 그린 최초의 눈 내린 풍경은 1867년에 그린 Un panier sur la route enneigée àHonfleur(눈 덮인 옹플뢰르 거리의 수레)이며, 그 뒤 노르망디 에트르타에 있는 동안 ‘눈 내린 풍경’이라는 주제의 그림에 집중하게 된다.


이 그림에 대하여 Manchester Metropolitan University(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의 교수인 Michael Howard (마이클 하워드)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늦겨울 오후, 내린 눈의 냉기와 함께 느껴지는 특별한 초혼(아마도 까치라는 새에 집중한 듯)과 연 푸르게 늘어진 눈 그림자는 크림색 하늘과 기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의 말처럼 눈 내린 단순한 풍경에 더해진 특별한 눈 그림자의 절묘한 색채와 까치 한 마리는 우리를 매우 특별한 세계로 안내하는 듯 보인다.




장자 이야기


호접몽.


昔者莊周夢爲胡蝶(석자장주몽위호접) :언젠가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栩栩然胡蝶也(허허연호접야) : 훨훨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自喩適志與(자유적지여) :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不知周也(부지주야) :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俄然覺(아연각) : 그러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則蘧蘧然周也(칙거거연주야) : 자신이 분명히 누워 있는 장주였다네. 

不知周之夢爲胡蝶(부지주지몽위호접) :그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胡蝶之夢爲周與(호접지몽위주여) : 나비가 꿈에 그가 된 것인지 몰랐다네.

 周與胡蝶(주여호접) : 장주와 나비는 

則必有分矣(즉필유분의) : 틀림없이 다른 존재일 것이므로 

此之謂物化(차지위물화) : 이를 <물화>라고 일컫는다네.


장자와 나비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지만 가끔은 왜곡되기도 하는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자라는 책을 매우 이상적이고 심지어 몽환적인 것으로 짐작하는 것에서 기인하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장자라는 책은 험난한 전장이 계속되는 일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지침서이고 동시에 그 험난함을 뛰어넘기 위한 극도의 자아성찰과 탐구를 위한 책이다.


장자와 나비 이야기를 좀 더 상세하게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자와 나비 이야기를 관통하는 개념은 물화(物化)다. 물화에 대한 장자의 생각을 알려면 장자의 ‘변화’에 대한 생각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변화(變化)의 철학’은 천지 만물은 모두 변화의 가운데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장자라는 책에서 이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장자가 ‘물화(物化)’를 직접 언급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가 나비와 장자가 반드시 구별이 있다고 하고 이것이 ‘만물의 변화 즉 물화(物化)’라고 한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장자가 나비로 또는 나비가 장자로 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자와 나비는 결국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자아(自我)와 외물(外物)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꿈속의 나비가 장자인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꿈속에서 훨훨 날아다니던 나비가 장자라는 것을 알려면 반드시 꿈에서 깨어나야 알 수 있다. 장자가 꿈을 깨지 않았다면 꿈속의 나비가 ‘나는 장자인 나비다.’ 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장자는 자기가 나비의 꿈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지만 나비가 꿈을 깨지 않는다면 알 수가 없다. 장자에서 나비로의 변화, 또는 나비에서 장자로의 변화는 이렇게 변화의 전(前)과 후(後)를 알 수 없다. 

 

어디까지나 영원한 장자도 없고, 영원한 나비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 너머의 세상을 알 수 없다. 마치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꿈속의 나비만, 꿈을 깨고 나면 장자만 있는 것처럼, 지금 살아있는 나만이 있을 뿐이다. 호접지몽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이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어쩌면 죽음 너머에서 보면 살아있는 나는 또 하나의 죽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물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세계로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을 뿐이다.



장자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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