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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18. 2016

L'Atelierde la rue ..., 1870.

있는 그대로

L'Atelier de la rue Condamine, 1870. Oil on canvas, 98cmⅹ128.5cm

Frédéric Bazille(프레데릭 바지유)의

L'Atelier de la rue Condamine(콩다민 가(街)에 있는 화가의 작업실) 1870


Frédéric Bazille(프레데릭 바지유, 1841~1870) 은 전체적으로 인상파의 범주에 속하는 화가이다. 그는 의학 공부와 미술 공부를 동시에 진행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물론 의사면허 시험에 낙방하여 의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의학 공부는 그의 회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Eugène Delacroix(들라크루와)를 존경하여, 그의 어떤 그림은 마치 들라크루와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상파 회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en plein air(외광 - 실외의 순수한 햇빛)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는데 바지유는 이 원칙에 매우 충실했으므로 그의 작품 대부분은 외광에서 그려졌다

1862년 그의 나이 21세 때 파리로 진출한 바지유는 그의 인생을 바꿀 몇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아직 유명해지지 않은 인상파 화가 Pierre-Auguste Renoir(피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와 Alfred Sisley(알프레드 시슬리)였다. 이들과 교류 중에도 바지유는 의학 공부를 계속하여 1864년 의사면허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한 뒤 본격적으로 화가 수업을 받게 된다. 바지유가 화가 수업을 받은 곳은 인상파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스위스 출신의 화가 Charles Gleyre(샤를 글레르)스튜디오였는데 위의 두 사람(르느와르와 시슬리)을 포함하여 인상파의 선구자 Claude Monet(끌로드 모네)도 같은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다.


바지유는 당시 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 개인 아틀리에를 소유하고 있었고 여기에 당시 유명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아틀리에에 동료들이 방문한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다. 


왼쪽 계단 밑에 앉아 있는 사람이 Pierre Auguste Renoir(르느와르)이고 그 위 계단에 서 있는 사람은 유명한 저술가이자 소설가이며 평론가인 Emile Zola(에밀 졸라)이다. 그다음은 이들보다는 나이가 많은 Eduard Manet(에두아르 마네)와 모자를 쓴 아직은 30대인 Claude Monet(끌로드 모네)가 서있다. 그다음이 이 방의 주인인 바지유 자신인데 자신이 얼마 전 그린 그림을 여러 사람에게 설명하고 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없으나 당시의 저명한 음악가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다.


바지유는 이 작품을 끝으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입대한 한 달 후, 보불 전쟁이 발발하여 그는 바로 전장에 투입된다. 그는 전투 중에 지휘관이 사망하게 되자 대신 부대를 이끌다가 29세의 나이로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참혹한 전쟁으로 꽃 피우지 못한 그의 예술세계가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화실의 느낌은 밝고 세련되었으며 벽에 걸린 그림들은 바지유 자신의 그림인지 또는 그가 존경하는 화가의 그림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그가 여러 화가들을 초청하고 화가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는 이 장면은 그가 가진 예술에 대한 열정을 단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장자 이야기


있는 그대로


聞在宥天下(문재유천하) : 천하를 편안하게 두어야 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不聞治天下也(불문치천하야) : 천하를 다스려서 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在之也者(재지야자) : 천하를 두어야 하는 까닭은, 

恐天下之淫其性也(공천하지음기성야) : 천하의 본성을 어지럽게 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宥之也者(유지야자) : 천하를 그대로 두어야 하는 까닭은, 

恐天下之遷其德也(공천하지천기덕야) : 천하의 덕을 변하게 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天下不淫其性(천하불음기성) : 천하의 본성이 어지럽지 않고, 

不遷其德(불천기덕) : 그 덕이 변하지 않는다면, 

有治天下者哉(유치천하자재) : 천하를 다스리려고 할 사람이 있을 것인가?


중국의 전통사상은 천명사상이다. 즉 천하의 모든 일은 하늘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지 인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 사상은 이미 하, 은, 주 삼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요순시대에 그 근원을 찾고 있다. 노장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의 전통을 지녀온 천명사상은 주로 우리 인간계의 화복과 흥망이 천명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聖帝(성제), 明王(명왕) - 훌륭한 왕]은 천명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리고 [庸君(용군 - 졸렬한), 暗主(암주 - 어두운) - 좋지 못한 왕]은 천명을 거슬렀으므로 패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의 화복도 그와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천명에 대한 생각은 정치, 윤리, 교육, 형법의 원리가 되었다. 그 원리 밑에서 모든 인간생활과 문물이 전개되고 사회제도로 규정되었다. 그리하여 근면, 성실하게 농경생활에 힘쓰고 인륜과 도의를 중시하며 사회질서를 잘 지키고 예속을 갖추어 갔다. 그 전통이 착실히 이어져 천명사상은 더욱 구체화되고 세속의 원리로 정치, 교화의 이념으로 삼았다. 공자의 사상은 이러한 천명의 전통과 생각을 집대성하고 현실 정치에 응용하여 천명을 현현(顯現)하려 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공자를 금성옥진(金聲玉振 - 처음과 끝 ; 음악을 시작할 때 쇳소리로 시작하여 돌 소리로 끝난다는 말에서 유래함.)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노자는 공자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새로운 사상을 제시했다. 천명 대신에 무위자연을 그 최고 원리로 하여 이미 굳어진 전형적인 전통이나 형식적인 봉건체제의 사회제도와 예악 문물, 도덕규범을 인위적인 조작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배격하고 파기하려 했다. 


이것은 전통의 천명사상에 대한 일대 혁명이며 반동이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유교는 근면 성실한 농경 생활을 근본으로 한 현실주의의 사회 풍토를 밑받침으로 한 세계관, 인생관, 사회관이었다. 반면 노자의 사상은 어떤 유토피아의 이상론을 그리면서 형식화된 제도와 예속을 일체 배격하고 새로운 세계관, 인생관, 사회관을 추구하는데 몰두한 초현실주의적인 이상주의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장자는 이 노자의 사상에서 더욱 진일보하여 사회의 모든 예속과 제도 등을 완전히 무시할 뿐 아니라 그러한 사상적 토대 위에 정치적 현실, 인간의 생존까지도 초월하려는 초 세간, 초 현실의 세계로 방향을 잡는다. 그것은 장자가 살았던 그 시기가 바로 전국시대의 말기로서 周(주)의 왕권은 땅에 떨어져 제후를 통제할 위력을 잃게 되어 군웅이 쟁탈을 일으켜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장자는 묵가, 명가, 법가, 병가 등의 제가 와는 그 범주를 달리하여 현실 문제보다 형이상학적인 우주관, 인생관을 설계하였다. 이는 그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항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유가나 그 밖의 제자백가도 장자의 생각에는 너무나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이러 것으로 유추해보면 노자의 생각이 상대적으로 온건하였다면 장자는 대단히 과격한 혁명가의 생각이었다.


장자 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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