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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n 08. 2019

百尺竿頭進一步

百尺竿頭進一步*(백척간두진일보)


彼滴希縣解*(피적희현해) 저 물방울 풀려나기 원하지만,

本始無所緣 (본시무소연) 본시 메인 바 없다네.

暫凝霧或露 (잠응무혹로) 이슬 혹은 안개가 잠시 엉기었을 뿐,

光照本無見 (광조본무견) 햇살 비치면 처음부터 본적도 없다네.


2019년 6월 8일 오전. 산그늘과 햇살 비추는 사이, 어제 내린 빗방울인지 아니면 안개가 물방울이 되었는지 풀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인간의 감정이 이입되는 순간 모든 것은 질서를 잃고 인간의 조작된 언어로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이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부질없이 몇 글자로 장면을 형용한다.   


* 百尺竿頭進一步: 100척이나 되는 대나무 끝에 서서 앞으로 한발을 내디뎌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는 말이다. 100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 위란 깨달음을 이룬 것을 말한다. 그런데 거기서 또 한걸음 더 나아가라면, 깨달음의 세계에 머무르지 말고 한 번 더 전진하라는 말이다. 즉, 이미 노력한 그 위에 죽음을 각오하고 더욱 노력하라는 말이다. 傳燈錄(전등록)에 나오는 말이다. 전등록의 원제목은 景德傳燈錄(경덕전등록)이고, 중국 송나라 시대에 고승 도언(道彦)이 1004년에 지은 선종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석가모니 이래의 역대의 法脈(법맥)을 체계화해서, 진리의 등불이 어떻게 전해지고 이어져 왔는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편집했고, 여러 부처들과 인도의 祖師들, 중국의 祖師들과 禪師들의 깨달음의 奇緣과 법어를 수록한 불교 서적이다. 조선 시대 과거 중 승과 과목에 전등록이 필수 과목이었다. 


* 장자의 대종사의 종(宗)은 宀(집 면, 갓 머리 – 집을 뜻함.)과 示(보일 시)로 된 글자인데 여기서 示는 제단(祭壇)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 뜻은 전체적으로 제단이 있는 집이라는 것으로서 옛날 신을 섬기는 제단이 가지는 함축적 의미가 으뜸, 마루로 변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말 마루는 정상이라는 의미인데 그 정상은 꼭대기 한 지점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정상부근 일대를 아우르는 말로서 명료한 경계를 가지는 서양의 꼭지점과는 사뭇 의미가 다르다 할 것이다. 어쨌거나 대종사는 큰 스승을 의미하는데 전체적으로 큰 스승은 특정 대상이 아니라 변화하면서도 변화하지 않고 복잡하면서도 매우 간단한 ‘자연’과 그것에의 순응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종사>에는 사인방이 나온다. 자사, 자여, 자리, 자래가 그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잘 웃는다. 그들은 왜 잘 웃는가? 도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도가 신체에 웃음의 효과로 나타났다고 하면 어떨까? 그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없음을 머리로 삼고, 삶을 등으로 삼고, 죽음을 꼬리로 삼아, 사생존망이 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난 이런 사람과 벗하고 싶네.”


 이 말에 네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고, 모두 벗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장마가 열흘이 지나도 멎지 않자 자여는 친구인 자사가 걱정 되었다. 먹을 것을 싸 들고 친구를 찾아갔더니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곡을 하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자여는 친구가 정신이 살짝 간 것이 아닌가 염려되어 어찌된 것인가 물었다.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자가 누구인지 생각해보았지만 알 수 없었네. 부모가 어찌 내가 가난하기를 바랐겠는가? 하늘은 사심 없이 모두를 덮어주고, 땅도 사심 없이 모두를 실어주니 어찌 하늘과 땅이 사사로이 나를 가난하게 하였겠는가? 나를 이렇게 만든 자를 찾았지만 알 수 없었네. 내가 지금 이 지경에 이른 것. 이것은 운명일세. 


 장마라는 천재지변에 먹을 것이 없다고 부모와 하늘까지 운운하다 운명에 기대는 그가 무능력해 보이는가?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천재지변으로 사고가 생기면 제일 먼저 내세우는 논리가 ‘인재’라는 분석이다. 이 정도의 피해가 온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은 담당 관리의 잘못. 이렇게 우선적으로 인간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자연의 변화일 수 있는 천재지변도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자사도 우선 부모 탓인가 묻는다. 연이어 자연에도 물으니 어디서도 그 탓을 할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이 운명이다. 사태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찾기를 멈추는 지혜에서 터득한 운명이다. 원인을 찾는 행위는 같았는데 다른 양상으로 드러난다. 사람의 탓으로 돌리게 되면 사람을 갈아치우든가, 재해를 막을 시스템을 바꾸든가.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 그럼 운명으로 받아들인 그들은 다르게 살았는가? 마주 웃은 후 그들의 삶을 보자.


 얼마 후 자여가 병에 걸렸습니다. 자사가 문병을 가서 자여를 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그대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병에 걸린 자여의 신체는 자사의 눈에 “곱사등이”로 보였다. 동시에 “음양의 기가 흐트러져”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이 모두가 “위대한 조물자”가 만든 것이다. 이 때 조물자는 만물을 태어나게 하는 또 다른 실체라기보다는 생명을 탄생시킨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도”를 이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도” 오로지 변화하는 속성으로 나타나니 자여의 “곱사등이”이 됨은 도가 변하는 순간인 것이다. 자사는 그 순간을 위대하다고 감탄한다. 곱사등이가 된 자여는 어땠을까?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네. 내 오른 팔이 점점 변해 활이 된다면 나는 올빼미를 잡아 구워먹겠네. 내 꼬리가 점점 변해 수레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이 된다면, 그것을 탈 테니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옛날의 이른바 ‘거꾸로 매달렸다가 풀려났다(현해)’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이 그것을 묶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또 사물이 天(自然)을 이기지 못한 지 오래되었는데 내가 또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


 자여는 생명 무 생명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지닌 “타고난 바탕을 온전히” 하겠다고 선언한다. 도를 터득한 친구 사이라서 가능한 화답이다. 아마도 그들은 또 웃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본 자료에서 생명체 중에 인간만이 웃는다고 했던 것 같다. 장자가 들었다면 모르는 소리라면서 또 논증의 도구를 쓰려 했을지도.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체가 움직이는 의미를 인간은 알 수 없다. 


그저 인간이라 말이라는 행위 전에 입 꼬리를 올리고 눈을 찢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도 통하는 경험이 반복되자 그것을 ‘웃음’이라 규정한 것뿐이다. 그저 그럴 뿐이다. 그래서 그들의 웃음을 슬픔을 극복한 웃음이라기 보다 도를 깨우치자 저절로 그러한 신체활동이다. 그들의 말은 자신이 처한 변화를 부정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다다른 긍정의 경지라기보다 그저 그러한 순간을 말하는 신체활동일 뿐이다.   


그들이 잘 웃는 것은 도를 터득한 경지에 머무르는 것을 드러내는 신체 활동이다. 그러면 잘 웃는 사람은 그만큼 도를 터득한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계해야 한다. 말의 속성인 분별이 갈라놓은 수많은 웃음의 종류라는 지식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저 웃는다. <덕충부>에서 사람들의 말에 그저 ‘맞장구’치던 애태타는 웃음이라는 신체활동이 또 다른 버전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의 웃음으로 바뀌는 순간을 떠올린다면 애타타에게 몰려든 사람의 심정에 훨씬 공감이 간다.


장자는 말한다.


 “옛날의 진인은 삶을 좋아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몰라, 태어난 것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무심히 왔다가 무심히 갈 뿐. 삶이 시작된 곳을 잊지 않았지만 삶이 언제 끝나는지 알려 하지도 않는다. 생명을 얻어 기쁘게 살다가 때가 되면 잊고 자연으로 돌아가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분별심으로 도를 손상시키지 않고, 인위를 자연에 덧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런 사람을 진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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