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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22. 2016

Portrait de l'artiste, 1855.

보광, 가려진 진리의 이미지

Portrait del'artiste, 1855. Oil on wood, 46cmⅹ37.5cm

고전의 엄격함이 느껴지는 

Portraitde l'artiste(예술가의 초상) 1855


자신의 모습을 대상으로 하는 자화상은 어떤 장르의 회화보다도 작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자화상을 그린 화가(Albrecht Dürer,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Vincent van Gogh, 우리나라 조선시대 윤두서, 강세황 등.)들의 자화상을 보면 작가 내부의 생각과 그 변화를 잘 감지할 수 있다. 이처럼 동, 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그의 작품 속에서 드러내는 방법의 하나로 자화상을 그렸다.  


Léon Joseph Florentin Bonnat (레옹 보나, 1833~1922)는 프랑스 남부 아키텐주 바용 출신이다. 13세 때부터 20세까지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살았는데 이때 그의 아버지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이런 환경 덕분에 어린 보나는 여러 종류의 서적을 접하게 되었고 필요한 부분은 필사와 스케치를 통해 많은 지식을 넓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보나는 스페인의 신고전주의 화가 José de Madrazo(호세 데 마드라조)가 세운 미술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 보나는 이 곳에서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화가 Diego Velázquez(디에고 벨라스케스)와 Jusepe de Ribera(후세페 데 리베라)로부터 다양한 예술적 영향을 받게 된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보나는 로마 상(prix de Rome)에 2등에 입상하여 이탈리아에 3년 동안 거주하면서 이탈리아 예술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에 프랑스 출신으로 이탈리아에 와 있던 Edgar Degas(에드가 드가), Gustave Moreau(구스타프 모로), Jean-Jacques Henner(쟝 자크 에너) 등과 교류하게 된다.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보나는 활발한 활동으로 34세 되던 해 Légion d'honneur(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고, 49세 되던 해 프랑스 최고 권위의 미술학교인 Ecole des BeauxArts(에콜 드 보자르)의 교수가 된다.


보나의 예술적 경향은 그의 자화상에서 보이듯이 매우 엄격한 고전주의 양식을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Academic painter(에콜 드 보자르의 영향을 받은 정형적이고 엄격한 화풍, 마치 그리스 로마 시기를 떠올리는 분위기의 작가)라고 부른다. 그와 밀접한 교류한 화가들은 드가를 비롯하여 Édouard Manet(에두아르 마네)가 있었는데 마네와는 스페인의 감상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그의 에콜 드 보자르의 제자들 중에는 상징주의 화가인 Pierre Puvis de Chavannes(피에르 퓌비드 샤반)과, 아주 잠깐 동안 가르치기는 했지만 거의 예술적 지향점이 다른 노르웨이의 화가 Edvard Munch(에드바르트 뭉크)도 있다. 이 초상화는 22세 때 보나의 얼굴로서 비범한 눈매와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턱선에서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해 갈 고전적 엄격함이 잘 드러나 있다.




장자 이야기


보광, 가려진 진리의 이미지


有未始有始也者(유미시유시야자) : 처음이 아직 태동하지 않은 때가 있고, 

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유미시유부미시유시야자) : 처음이 아직 태동하지 않은 때마저도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가 있다. 는말이 있다. 

'있다', '없다'의 개념이 존재하기 이전의 상황에 대한 동 서양의 접근방법은 사뭇 다르다. 영어 Chaos(혼돈)의 어원을 살펴보면 "utter confusion(전적인 혼란)"으로 되어있다. 물론 불가타 성서(라틴어로 쓰인 성서)에 근거하여 풀이된 말이므로 종교적 의미를 뺀 카오스 자체의 의미는 문득 모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동양의 경우는  無라는 개념이 있는데 글자 자체로 불(火)이 빽빽한 나무를 태워 없앤 모양을 뜻한다. 즉 비어있음, 혹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감의 의미도 포함한다. 따라서 동 서양의 '있다', ' 없다'에 대한 논리 전개는 확연히 달라지고 만다. 


장자에 등장하는 위의 말은 시원적 문제에 대한 동양적 표현이며 동시에 그 시원의 무형성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다. 말로 표현되어 있으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장자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독일 철학자로서 현상학의 대가다. 그가 가졌던 의문의 핵심은 존재였다. 과연 ‘있다(Sein)’는 어떤 상황을 규정하고 있을까? 있다는 곧 존재인데 하이데거는 이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시간(Zeit)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명료해지지 않는다. 아니 명료해질 수 없는 문제다. 하이데거는 여러 가지 논리적 방법을 통해 언어를 비틀어 이 사실을 완곡하게 설명하지만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비어 있음, 즉 無 에 대한 가치관이 서양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더불어 無를 ‘존재’ 양식으로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장자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無에 곧장 기대어 버린다. 왜냐하면 동양사상의 뿌리에는 존재 이전의 단계, 즉 無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언어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순간, 無가 有로 바뀔 수 있는 위험성이 증가하기는 해도 그 외에 존재 이전의 상황을 설명할 적절한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장자는 짐짓 자신을 낮추며 이렇게 말한다.


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이미지오소위지기과유위호) : 나의 말이 과연 말한 바 그것인지 알지 못하고,

其果无謂乎(기과무위호) : (그것이 아니면) 말하여지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우리의 장자는 葆光(보광)이라는 말을 창조해낸다. 즉 가려져 있는 진리라는 뜻인데, 완벽하게 사태를 규명하지 못함을 자인하는 것임과 동시에, 아주 복잡하고 애매한 것은 오히려 규명하지 않기로 하는- 독자에게 그 과제를 떠 넘기는, 어쩌면 스스로 그러한 능력이 되지 못함을 인정하는 용기일 수도 있겠다.


장자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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