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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24. 2016

Le Rêve, 1888

실체와 은유

Le Rêve,1888. Oil on canvas, 300cmⅹ400cm

군사화의 발전, 

Jean-Baptiste Édouard Detaille(쟝 밥티스트 에두아르 데타이유)의 Le Rêve(꿈) 1888


Jean-Baptiste Édouard Detaille(쟝 밥티스트 에두아르 데타이유 1848~1912)는 파리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가 나폴레옹 시절 군수업을 했던 관계로 군수 공장이 많았던 프랑스 북부 피카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이런 환경은 데타이유가 군사 회화를 그리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인 경우와는 매우 다르게 어린 데타이유에게 예술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한 아버지의 적극적인 권유로 데타이유는 어렵지 않게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17세 되던 해 Jean-Louis-Ernest Meissonier(쟝 루이 에른스트 메쏘니에)라는 당대 유명한 군사화가(군부대의 주요한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을 주로 하는 화가 ; 요즘의 종군 사진 기자와 비슷함)에게 사사하게 된다. 따라서 데타이유는 메쏘니에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 영향은 곧 그의 화면에서 정확한 색채와 정밀한 묘사로 나타나게 되었다. 


1867년, 그의 나이 19세 드디어 Académie des Beaux-Arts(아카데믹 데 보자르 : 국립 미술학교 학생 작품전)에 출품, 화가로써 데뷔한 데타이유는1868년 그의 첫 군사화, L'arrêt Drummers(멈춰진 북)를 선 보이게 되는데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여 표현한 그림이었다. 그는 1870년 알제리로 스케치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이 발발하게 된다. 이에 프랑스로 돌아온 데타이유는 그 해 11월에 전쟁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은 그의 회화에서 군인들의 동작과 유니폼의 묘사, 군인들의 일상의 삶을 묘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Le Rêve(꿈)이라고 명명된 이 그림은 1870년 보불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 전장(戰場)에서 야영하는 장면을 십 수년이 지난 뒤 데타이유가 상상하여 묘사한 그림이다. 3 정의 총을 거총하여 줄을 맞추고 맨 처음 거총한 곳에 기상나팔을 걸어 두었고, 두 번째 세 번째 거총한 곳에는 이 부대의 깃발이 잘 말려 올려져 있다. 지금은 총기는 작고 짧아져서 특별히 총기를 모아 두지 않고 개인이 휴대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보불전쟁 당시의 총은 길고(심지어 착검한 상태) 컸기 때문에 이러한 거총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총구 끝의 가늠쇠를 이용한 이러한 총기의 보관 방법은 총을 바닥에 놓아 생기는 습기로 인한 총열의 녹슮 방지와 함께 착검된 칼의 위험, 그리고 격발을 방지하기 위해 총구를 하늘로 향하게 하여 불의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병사들은 노천에서 모자를 덮어쓴 채 단잠을 자고 있는데 멀리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아직 단잠 속에 있는 병사들의 꿈속에 보일지도 모르는 장면이 하늘에 펼쳐져 있다. 수많은 깃발을 든 알 수 없는 군사들이 구름 속에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군인들에게 하늘의 가호가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들판 전체에 새벽 기운이 퍼지는 가운데 밤새 들판 곳곳에 피워놓은 모닥불에는 연기만 간간히 오르고 있다. 


데타이유는 화가로서뿐 아니라 실제로 군사적인 것에 관심을 두어 1885년에는 프랑스 “L'Armée Française(프랑스 군 편제)”라는 책을 펴냈으며 1912년에는 당시 프랑스 군대의 제복을 디자인했다. 하지만 이 군복은 적용되지 못했지만, 1차 대전 때 일부 프랑스 군복의 원형이 되기도 했다.     




장자 이야기


실체와 은유


장자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이는 혜시(혜시는 장자와 마찬가지로 전국 시대 송나라 사람이다. 위나라가 주 활동지이며, 위나라 혜왕 때 재상이 되었다. 그는 궤변론자인 명가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다.)이다. 혜시는 언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 설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혜시는 확정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뒤집으려고 노력했다. 


장자와 혜시가 연못가에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 

장자가 말했다. 물고기가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소. 이게 바로 물고기의 즐거움이란 거요.      

혜시가 말했다. 당신은 물고기가 아니요.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이오?       

장자가 받았다. 당신은 내가 아니오.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걸 안단 말이오?      

혜시가 다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물론 당신을 알지 못하고, 그러고 보면 당신은 물고기가 아니니까 당신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게 확실하단 말이오.      

장자가 다시 받았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말해 봅시다. 당신은 “어찌 당신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이오?”라고 했지만 이미 그것은 내가 물고기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내게 물은 거 아니오?      

당신은 내가 아니면서도 나에 대해 그렇듯 알고 있지 않소?


물론 이 대화에서는 혜시가 장자에게 지고 만 것처럼 보이지만 내 생각으로는 장자의 억지가 더 많아 보인다. 이를테면 장자야 말로 말 꼬리를 잡고 문제의 본질을 뒤집어 보려는 얄팍한 술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대화에서 혜시는 언어의 이면에 대한 본질을 꿰뚫고 있는 듯한데 2천 년이 지난 뒤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의해 고안된 기의(記意, signifié 시니피에)와 기표(記表, signifiant 시니피앙)의 구분에 대한 매우 적확(適確)한 용례가 아닐 수 없다.


혜시는 우리가 사물에 부여해 버린 절대적 속성(일반 특성의 시간적, 공간적 속성 또는 분류적 속성)을 다양한 변증법적 방법을 통해 부정하였다. 혜시는 高低 大小 같은 속성이 무한 공간에서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혜시가 말한 것처럼 만약 언어가 고정된 진위 판단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또 그런 방법론적 오류에 오염되지 않았다면, 더불어 선입관이나 사물의 상대적 구별을 절대화하는 도구를 쓰이지 않는다면, 세계에 대해 우리의 경험에서 얻는 것을 언어는 정확하게 설명해 줄 것이다. 


언어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인 의미로나 절대적 시비의 관점을 표시할 수는 없다. 언어의 근거가 되는 특정 존재(有)의 근거는 모두 無(무)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장자의 ‘꿈과 나비’에서 꿈은 실재하지 않는 그림자이다. 어떤 개념도 어떤 묘사도 실체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되거나 고정된, 완벽한 자체적 “자기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장자 사상에서 은유는 매우 중요하다. 장자는 사물의 독특한 무늬, 다양성, 고유성에 대해 논할 때, 다양한 은유적 방법을 동원했다. 


장자 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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