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종교인으로서의 생각

by 김준식

비 종교인으로서의 생각

사이비 종교인지 아니면 종교조차도 아닌지 모르는 신천지가 세상을 흔들고 있다. 신천지가 있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사이비 계보를 살펴보니 그들이 이용한 것은 주로 성경의 요한계시록이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언어를 직접적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언어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교세를 키웠다. 그럼 요한 계시록은 무슨 내용인가?


계시록의 영어단어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天機漏洩(천기누설) 정도로 바꿀 수 있다. 이를테면 거의 모든 내용이 암시요, 비유다. 보통의 언어적 해석으로는 그 진의에 다가갈 수 없고, 또 알 수도 없는 일종의 암호인 셈이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매달려 이 알 수 없는 암호를 풀고 싶어 했겠는가? 혹시나 영생의 비밀이, 혹시나 천국으로 가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약한 인간의 욕망들이 요한계시록을 더욱더 신비롭고 강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비 신앙인인 나의 생각으로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아마도 일상을 잘 유지하고 행복하게 살면 거기가 천국이다라는 아주 평범한 진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자니 뭔가 사람들이 잘 지키지 않을 것 같으니 마치 암호처럼 비유와 암시로 기록해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해보니 늘 언어가 문제다. 예언, 계시, 비유, 암시 … 이 모든 것이 언어적 수단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그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부정확한가? 이런 문제를 고민한 사람이 동양의 불교 수행자에게도 있었다. 그가 바로 나가아르쥬나, 즉 용수 보살이다. 그의 논리를 우리는 중관사상이라 부른다.


중관사상은 인간의 언어논리의 진실성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간은 언어논리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인간 간의 교감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부처도 언어논리에 의존함이 없이는 설법을 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언어가 없었다면 부처의 가르침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아무리 깨달음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수단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인간의 언어논리에 의한 사물의 변별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궁극적인 목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방편이다.


부처가 중생에게 깨달음을 직접 줄 수는 없다. 부처의 말은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일 뿐, 인간은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의 말은 깨달음으로 쉽게 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지시해주는 안내판이나 이정표와 같은 것이며, 그 과정에 있는 방편으로서 언어는 깨달음이라는 목적지로 빠르고 정확하게 갈 수 있게 해주는 기차나 비행기와 같은 것이다.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부처가 제시한 방편에 의해 수행을 하고, 부처의 방편을 통한 가르침에 의해서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늘 해석의 오류가 생기고 분파가 발생한다. 용수보살은 그러한 관점에서 중관사상(공허한 사변논리를 극복하자는 생각)을 주장한 것이다.


다시 요한계시록으로 돌아가 보자. 그 또한 예수, 혹은 요한이 우리에게 언어라는 방편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라는 방편에 매몰되어서는 예수, 혹은 요한의 생각에 다가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즉 그 언어를 넘어선 진리를 발견해야 하는데 사이비들은 그 표면적 언어에 목숨을 건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그저 도구일 뿐이다. 결국 본질은 비 언어적 방법을 통하여 스스로 획득하는 것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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