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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Oct 09. 2016

La Payé des moissonneurs, 1882

현해

La Payé des moissonneurs, 1882. Oil on canvas, 215cmⅹ272cm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절묘한 조합,

Léon Augustin Lhermitte(레옹 오거스탱 레르미트)의 

La Payé des moissonneurs(일꾼의 품삯 계산) 1882


저녁 무렵 거대한 낫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중년의 농부는 일에 지친 듯 몹시 엄숙하고 동시에 처연한 자세로 앉아있다. 클로그(Clog)(나막신)를 신은 그의 모습은 성자의 모습을 닮아있다. 농가 한 켠, 공터에서 오늘 한 일에 대한 품삯을 받는 젖먹이가 딸린 아낙이 어쩌면 그의 아내와 아들인지도 모른다. 농부의 모습은 비슷한 분위기의 Jules Bastien-Lepage(르파주)가 그린 건초 만들기에서 등장하는 아낙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체념과 비감이 교차하는 그의 모습을 화가는 매우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의 절묘한 조합을 보이는 이 그림은 Léon Augustin Lhermitte(레옹 오거스탱 레르미트 1844-1925)의 작품, La Payé des moissonneurs(일꾼의 품삯 계산)이다. 레르미트는 파리 북부 Mont-Saint-Père(몽셍 페레) 출신으로 사실주의 작가로 분류되는 화가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어린 레르미트가 미술에 소질을 보이자 일찍부터 화가 수업을 받게 했다. 레르미트는 이러한 아버지의 격려로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 de Paris(국립 파리 장식 예술 학교)에서 Lecoq de Boisbaudran(르 꼬그 데 보아보드랭)의 지도하에 미술 수업을 받고 1864년 파리 살롱에서 화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화가 스스로 밝히듯이 Jean-François Millet(밀레)에 대한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작품 또한 그러한 범주에 있는 작품으로서 밀레와 같은 세기를 살았다지만 암담하고 힘든 느낌만이 주조를 이룬 밀레가 묘사한 농촌의 삶에, 좀 더 세밀하고 객관적인 기법을 적용하여 객관적 사실의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농부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항아리는 일종의 물통이나 간식 통인데 주둥이와  그 옆 고리에 줄을 묶어 이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반대쪽 허리에 매달려 있다. 물 먹을 시간조차 아껴야 하는 당시 농부들의 쉴 틈 없는 노동 상황을 반영하는 소품이다.


레르미트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그림을 전시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특히 이 그림에 대하여 동시대의 또 다른 화가 Vincent van Gogh(고흐)가 다음과 같은 글을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썼는데 이 글로 미루어 당시 이 그림에 대한 파리 화단의 반응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흐의 글은 다음과 같다. “Le Monde Illustré(르 몽드 일러스트레)라는 신문에 실린 레르미트의 이 그림(La Payé de smoissonneurs)은 나에게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주어 나도 모르게 그를 따르고 싶어 진다. 지난 몇 년 동안 레르미트의 그림 중 단연 최고의 작품이며, 이 그림에 마음을 뺏겨 저녁 내내 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




장자 이야기


현해


장자가 본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태어난 것도 아니요, 자신의 의지로 죽는 것도 아닌데, 현실의 삶은 자기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고독하고 절망적인 절대 부자유의 존재였다. 


이러한 인간에게 장자는 ‘산다는 것’에 최대가치를 부여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장 절실한 문제로 삼고 물음을 던진다. “천지 만물 속에서 지금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사는 삶이 지속 가능한가?” “인간인 우리가 자기의 의지로 살 수 없는 절대 부자유한 존재임을 아는가?” 


장자의 눈에 인간의 모습은 그 자체로 모순덩어리이다. 하지만 장자는 이 생각에서 진일보하여 천지만물 중에 어찌 인간만이 그러한가?라고 생각한다. 인간도 만물 속의 하나의 존재일 뿐인데, 왜 인간은 스스로 천지 만물 속에 어우러져 살지 못하고 스스로 노예처럼 속박된 삶을 살고 있는가? 다만 인간도 천지만물의 존재들처럼 스스로 그 많은 부분 중의 하나라고 여기면 될 것을 오히려 인간은 그 천지만물과 다른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도대체 왜 그러지 못하는가?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명(命 – 객관적 상황, 즉 천지만물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 해서 부자유를 넘어 절대 자유의 경지에 설 수 있음을(懸解:현해) 왜 모르는가?"라고 장자는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현(懸)이라는 글자는 매달다는 뜻의 현(県) 자와 실 사(絲) 자가 위에 있고, 그 밑에 마음(心)이 있어 마음에 의해 매달린 것이 결정되고 있음을 뜻하는 아주 복잡한 한자이다. 이것은 마음 한 곳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사소한 근심 걱정으로부터 삶의 본질, 혹은 죽음에 이르는 문제까지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매듭에 대한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해(解) 자 역시 여러 가지 글자가 모여있는데, 뿔 각(角)과 칼 도(刀), 그리고 소 우(牛)가 합쳐진 글자로 장자의 또 다른 이야기인 포정의 이야기를 떠 올리게 한다. 즉, 칼을 이용하여 소를 잡는 포정처럼 뭉쳐져 있는 것을 풀어헤치거나 아니면 잘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해는 우리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근심이나 집착(삶과 죽음의 문제까지 포함하는)을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끊어버리는 순간 거기에는 완전한 자유가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불교적 의미로 해석하자면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즉,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단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그 절체절명을 넘어 존재할지도 모를 자유의 세계에 도달하는 방법인 것이다. 

장자 양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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