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 그 깊고 깊은 세계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1899)의 국적은 영국이지만 프랑스 파리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인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낸다. 그는 인상파 화가로 분류되며 École des Beaux-Arts(에꼴 드 보자르)에서 공부하고 Claude Monet(끌로드 모네)와 Frédéric Bazille(프레데릭 바지유) 등과 교류했다.
그는 1866년 살롱 전에 입상하여 화가로 데뷔한다. 1870년, 보, 불 전쟁을 피해 잠시 영국에 피해있기도 했다. 1880년 시슬레는 퐁텐블로 숲 가까이 있는 Moret-sur-Loing(모레 쉬르 루앙)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퐁텐블로 숲의 부드러운 풍광이 시슬레의 재능과 조화를 이루어 시슬레의 중요한 작품들이 그려지게 된다.
Moret-sur-Loing(모레 쉬르 루앙)에 정착하기 전 시슬레가 잠시 머물렀던 파리의 Port-Marly(마를 리 항 ; 정식 명칭 Marly-le-Roi 마를리 르 루아)에 머물렀는데 이 마를리 항은 오래된 도시로서 도시 전체가 귀족적 풍모를 지닌 도시였다.
이 그림은 1876년, 홍수가 난 Port-Marly(마를리항)을 배경으로 그려진 6개의 연작 중 하나이다. 홍수가 그친 도시의 하늘은 점점이 흩어진 구름 사이로 파랗다. 홍수가 난 물 위로 햇빛이 비추고 그 빛의 반사가 시슬레의 감각을 자극했을 것이다.
가득 찬 홍수 탓에 이제는 물바다 된 숲 사이를 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이채롭다. 건물(마를리 항에 있던 큰 포도주 상점이었다.) 가까이 두 명의 사람이 탄 배는 긴 노를 저어 어디론가 가고 있다. 시슬레는 이 건물의 굴곡진 부분의 빛과 그림자를 매우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검은색 창틀과 지붕의 튀어나온 장식의 복잡한 그림자가 나무나 물의 평면성에 비해 이 집을 매우 입체적으로 만들고 있다. 굵은 점묘는 오히려 대상물의 느낌을 더 강하게 하여 푸른 하늘만큼 그 빛에 반사되는 물빛을 강렬하게 만든다.
시슬레는 영국에 여러 차례에 다녀오면서 몇 개의 작품을 그렸고, 그 작품들은 현재 영국에 소장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영국에 다녀온 다음 해에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했으나 시슬레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것을 거절했고 그는 영국인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인상파의 여러 화가와 마찬가지로 시슬레 또한 자포니즘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게 된다. 시슬레의 작품에서 자포니즘(동양의 압도적 자연 풍경)은 서양의 감성에 맞게 재해석된 풍경화가 많은데 이는 당시의 인상파 회화의 핵심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그림에서도 하늘과 구름의 세부 묘사는 어딘지 모르게 동양인인 우리에게 낯익은 풍경의 느낌이 든다. 더욱더 동양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물을 배경으로 하는 자연의 풍광인데 그림의 왼편에 자리 잡은 건물만 없다면 이는 마치 아득하고 평화로운 산수화의 느낌을 자아낸다. 시슬레가 감동한 자포니즘은 다만 채색과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그림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물(齊物)이란 ‘물(物)을 가지런히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인간을 포함해서 우주 만물 간의 절대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이다.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에 귀천은 없다.” “도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하단 말인가?” 그러므로 “만물은 한결같이 평등하다.”
장자의 절대 평등론은 현대의 평등사상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현대의 평등론은 권력, 돈, 지위 등과 같은 희소 자원의 분배에 있어서의 평등 혹은 불평등에 대한 사상이다. 이에 반해서, 장자의 평등론은 모든 사물이 ‘참된 자아’를 내재하고 있다는 의미로서 보다 시원적이며 초월적인 평등사상이다.
현대의 전형적인 인간관은 ‘욕망 추구자’로서의 인간이다. 근대에 이르러서 인간들을 세계와 근원적으로 분리된 개체로서 자아를 인식하는 “개인”이라는 관념이 발달하면서, ‘욕망 추구자’로서의 인간관이 확산되었다. 인간을 세계와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어떠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오직 이 세계는 '나',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내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이용하고 극복해야만 할 대상이 되고 만다. 이렇게 되었을 때, 세계는 나의 욕망 충족의 대상물일 따름이요, 그 반대편의 나는 오로지 욕망을 추구하는 고립된 개인일 뿐이다. 이러한 ‘욕망 추구자’로서의 인간관은 현대에 이르러서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는 인간관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
인간을 ‘욕망의 추구자’라고 전제하였을 때,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권력이나 지위 또는 돈과 같은 욕망 충족의 대상물을 얼마나 많이 획득하였는가’ 하는 것이 된다. 현대 사회의 평등은 바로 이런 현대적 인간관의 바탕 위에 형성된 것이다. 즉, 현대사회의 평등이란 희소 자원의 배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에 반해서, 장자는 사물이란(인간을 포함한) ‘참된 자아’를 내재하고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물관, 혹은 인간관에 입각하여 장자의 주된 관심은 모든 사물이 모두 ‘참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사람의 영역으로 한정시켜보면 모든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반드시 ‘참된 자아’가 내재되어 있는데(꼭 얼마나 깨닫고 실현하였건 간에) 이 '참된 자아'의 소유자라는 면에만 집중해보면 인간은 누구나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집중하고 있는 장자의 생각이 바로 '제물'의 바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