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읽는이유
화가와 부자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구스타브 카유보트(GustaveCaillebotte 1848-1894)는 그런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주인공이다. 변호사이자 동시에 기술자였던 카유보트는 보불 전쟁에 참전한 후 ‘레옹 보나’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그림을 배우다가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한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이곳을 나와 여러 화가들과 교류하였는데 Edgar Degas(에드가 드가)와 이탈리아 출신의 Giuseppe de Nittis(주세페 데 니티스)였다.
부유한 카유보트는 파리 중심가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사실주의에 입각한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상주의의 빛과 사실주의의 정확함이 같이 존재하는 그의 화풍이 그대로 표현된 작품이 바로 1875년에 그린 이 그림 ‘바닥 대패질하는 사람 (Les raboteurs de parquet)’이다. 이 그림은 지나친 사실성 때문에 오히려 살롱 전시회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만다.
바닥에 엎드린 세 명의 남자가 대패질을 하고 있다. 나무 바닥이 오래되어 비틀리거나 오염된 부분을 깎아내고 새롭게 칠을 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카유보트는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적 화풍도 이 그림 속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빛에 대한 카유보트의 독특한 해석이다. 창으로 들어온 빛이 마치 전등을 켠 것처럼 방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그 빛은 바닥에 반사되어 벽체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 남자의 벗은 상체에 반사된 빛과 그들의 그림자가 절묘하게 어울려 상당한 현장감을 자아낸다.
약간은 과장되고 독특한 원근법과 치밀하고 완벽한 구성으로 파리 시내 풍경을 그렸던 카유보트는 여러 면에서 완벽했다. 파리 중심부 Petit-Gennevilliers(프티-젠느빌리에)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여러 화가들을 초청하고 그들에게 많은 경제적 도움을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46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화가로써 명성을 얻기 시작했을 때부터 가난한 화가들의 그림을 사 두었던 그는, 유언으로 이 작품 전체를 국가에 기증하게 된다. 하지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반대로 일부 작품은 거부되었는데 192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프랑스 정부는 기증한 모든 그림을 수용하게 된다.
勞我以生(로아이생) : 삶으로 우리를 수고롭게 하고,
佚我以老(일아이로) : 늙음으로 우리를 편하게 하며,
息我以死(식아이사) : 죽음으로 우리를 쉬게 한다.
故善吾生者(고선오생자) : 그러므로 스스로의 삶을 잘 사는 것은,
乃所以善吾死也(내소이선오사야) : 곧 스스로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과 같다.
왜 삶은 “수고로운가?” 수고롭다는 것이 힘들고 괴로운 것 아닌가? 그러면 삶이 단지 괴롭기만 하다는 뜻이란 말인가?
왜 늙음이 “편하냐?” 늙는다는 것은 괴롭고 나약해지는 것 아닌가?
왜 죽음이 “쉬게 하느냐?” 죽음은 무섭고 힘들며 음습한데 그것이 쉬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삶을 ‘욕망’의 구현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 ‘욕망’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단세포적 욕망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무언가를 이뤄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그것은 단지 수고로움만은 아닐지 모른다. 거기에는 행복과 성취가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있다. 맞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이것을 부정적인 문제점이라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긍정적 삶의 태도라고 인정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뭔가 허전하다.
늙음에 대한 우리의 견해도 어쩌면 선입견에서 기인하는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늙으면 몸이 불편해진다. 따라서 모든 것이 편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장자는 편하다고 하니 이 말이 쉽게 이해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여기의 늙음은 다만 육체의 늙음과 불편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편하다는 의미로 쓰인 일(佚)은 사람 인과 잃을 실(失)이 합쳐진 글자다. 즉,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으면(즉, 놓아 버리면) 편해진다는 의미인데 그러한 경험이 없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은 분명 아니다.
죽음이 쉼이라는 이야기는 정말 요령부득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 말은 처음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인데 처음이 잘 이해되지 않는데 이 말이 이해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장자가 쓴 글, 장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여전히 “고전의 향기”인데 왜 여기에 삶이, 늙음이, 죽음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故善吾生者(고선오생자), 乃所以善吾死也(내소이선오사야) 의 경지는 우리에게 어쩌면 아직은 다가갈 수 없는 먼 세계 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누군가 그 경지를 아는지는 논외로 한다. 정확하게 우리는 광막한 삶의 바다에서 알 수 없는 여러 형태의 풍랑을 만나 고통스러워하고 또 기뻐하며 또는 그것을 피하고자 할 뿐이다.
장자라는 책은 끊임없는 회의와 고통스러운 자기부정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절대의 ‘자유’에 대한 인간 장자의 절치부심이 담겨 있는 고백록에 가까운 이야기다. 삶의 지침서도, 또 방향타도 그리고 지친 영혼을 달래 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안타깝지만 그 속에 없다. 오히려 장자라는 책 속에는 불편한 비유와 혹은, 현실에 대한 장자적 야유와 현실의 부정과 그것에의 또 다른 부정이 우리를 어지럽고 불편하게 한다.
장자의 비유에 의하면 우리는 참새나 쓰르라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붕새의 비행(절대경지)을 보며 위안을 삼는 것이 아니라, 붕새가 그 큰 날개가 밀어내는 공기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다만 현실의 우리를 다잡아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참새이자 쓰르라미인 우리가 그 흐름을 위해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의 범위를 깨고 또 깨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동시에 그 처절한 고통의 몸부림도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이것도 고전의 향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