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는 인상주의 회화의 정점에 위치하는 화가로서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다.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 절묘하고 환상적인 색채의 조합은 그의 어린 시절과 연결되어 있다. 르누아르는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도자기 산업으로 유명한 작은 도시 리모주(Limoges) 출신이다. 당연히 어린 시절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면서 도자기의 채색을 통해 색채감을 익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색채적 감성에 자극받은 르누아르는 때때로 멀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여 대가들의 작품들을 보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마침내 그의 나이 21세 때인 1862년, 당시 파리에 머물던 스위스 출신 화가 Charles Gleyre(샤를 그뢰르)의 문하에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이곳에서 훗날 인상주의의 핵심 인물들이 되는 Alfred Sisley(알프레드 시슬리), Frédéric Bazille(프레드릭 바지유), 그리고 Claude Monet(끌로드 모네)를 만나게 된다. 1864년 파리 살롱으로 데뷔한 르누아르는 1870년 보불 전쟁과 1871년 파리코뮌을 겪게 되는데 이 시기에 그는 이전(루브르 박물관의 영향)의 들라크루와와 쿠르베의 영향에서 벗어나 외광(Plein Air)의 효과와 색채가 강조된 그림을 그리게 된다.
1876년에 그려진 이 그림 Baldu moulin de la Galette(물랑 드 레 갤레뜨의 무도회)는 몽마르트르 지구에 있는 물랑 드 레 갤레뜨에서 오후를 보내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19세기 말, 파리 사람들이 즐겨먹던 Galette(메밀을 주 재료로 만든 팬케이크의 일종)를 팔던 장소에서 갤레뜨와 음료를 즐기며 오후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장면을 르누아르는 묘사하고 있다. 햇살과 나뭇잎들이 만나 산란된 빛들이 사람들의 옷 위에서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절묘한 느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이 그림은 다양한 사람들의 옷과 모자, 그리고 각종 장신구와 사람들의 얼굴들이 환상적인 색채로 묘사되어 있다.
행복한 표정이 가득한 사람들과 화려한 샹들리에, 그리고 초록이 어우러진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린 이 그림은, 인상주의 회화가 지향하는"실제의 삶"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1879년 이 그림은 역시 인상파 화가이자 그림 수집가였던 Gustave Caillebotte(구스타프 까이유 보트)에게 소장되어 있다가 까이유 보트가 사망하자 프랑스 정부에 귀속되게 된다. 그 뒤, 이 그림은 1929년까지 Musée du Luxembourg에 걸려 있다가 Musée du Louvre로 옮겨 1986년까지 전시된다. 1986년 다시 오르세 박물관으로 옮겨 현재까지 전시되고 있다.
知謂無爲謂曰(지위무위위왈) : 지가 무위위에게 말했다.
予欲有問乎若(여욕유문호약) :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何思何慮則知道(하사하려칙지도) : 어떤 것을 사색하고 어떤 것을 생각하면 도를 알게 됩니까?
何處何服則安道(하처하복칙안도) :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행동하면 도에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됩니까?
何從何道則得道(하종하도칙득도) : 어떤 것을 따르고 어떤 길로 가면 도를 얻을 수 있습니까?”
숨차게 물어보는 지의 태도로 미루어 지의 알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三問而無爲謂不答也(삼문이무위위부답야): 세 번이나 물었으나 무위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는 이야기 하는 순간 도가 아님을 무위위는 알고 있었다. 더욱더 미치도록 궁금해진 지(知)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만나는 사람들마다 도를 묻는다. 그랬더니 지는 문득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無思無慮始知道(무사무려시지도) :“사색도 없고 생각도 없어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된다.
無處無服始安道(무처무복시안도) : 처신하는 곳도 없고 행하는 것도 없어야만 비로소 도에 편안히 지내게 된다.
無從無道始得道(무종무도시득도) : 따르는 것도 없고 가는 길도 없어야만 비로소 도를 얻게 된다.”
지는 아마 절망했을 것이다. 지의 속성은 사색이 바탕이며 생각이 줄기이고 행하여야만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지는 추종 해야 하고 지는 분명한 노선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인데 그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야만 도를 알 수 있다니!!!
이를테면 도는 지혜나 지식의 범위를 넘는 그 무엇이다. 일상을 유지하는 우리의 "삶"과 "도(道)"는 철로처럼 언제나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知)의 범위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도(道)의 세계를 장자는 무위위(無爲謂 - 아무것도 이르지 않음)라는 용어를 만들어, 즉 우언(寓言)으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우언(寓言)이란 우화의 형식으로 나타내 것을 말하며 여러 비유와 암시, 은유의 형태를 띤다. 우화는 말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는 다른 의미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우언(寓言)은 사람들이 자기 입장과 같으면 따르고, 다르면 반대하며, 자기 생각과 같으면 옳다 하고, 다르면 잘못이라 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으로 일인칭(我)과 이인칭(彼)을 떠나 3인칭(여기서는 지와 무위위)적 태도로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장자 전체를 두고 보면 우언으로 표현된 것은 80%가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