坎止
九人別生消*(구인별생소) 여러 사람들은 생성과 소멸을 구별하지만,
滅完現未滿*(멸완현미만) 소멸은 완성이요, 나타남은 차지 않음이라.
象罔得玄珠*(상망득현주) 상망이 현주를 얻었듯,
前圩當待坦 (전우당대탄) 웅덩이 앞에서 마땅히 평평하기를 기다리네.
2020년 4월 25일 밤. 하루 종일 바람이 거셌다. 모든 일을 잠시 중단하고 오늘은 집 청소를 했다. 봄이 다 가고 있는데 그동안 내가 사는 공간을 맑게 하는 것에 시간을 쓰지 못했다.
오후에는 몇 가지 일로 외출을 했다가 그동안 뜸했던 지인이 운영하는 커피숍에 들렀다. 커피숍 한 켠에서는 주역을 공부하신 분이 뭔가를 열심히 다른 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미루어 주역을 통한 삶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직 주역을 깊이 공부하지 않아 감히 주역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옳지는 않으나 거칠게 주역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은 단어는 坎止였다. 사전적 의미는 坎을 ‘험난하다’로 뜻을 새겨 ‘일이 험난한 지경에 다다라 그만둠’이지만 주역적 의미로는 坎을 ‘구덩이’로 새겨 ‘물이 구덩이를 만나 멈춘다’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즉 삶을 하나의 흐름으로 본다면 때로 구덩이를 만나 멈추지만 끊임없이 흐른다면 마침내 구덩이를 차 올라 다시 평평하게 흐를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평평하게 차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근한 기다림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주역을 해석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흐름이 운일 수도 있고 또 돈일 수도 있겠다.
2020년 봄 전 세계, 그리고 대한민국은 코로나로 어려운 지경에 빠진 사람들도 많고 또 실제로 매우 어렵다. 내가 일하는 학교도 어렵고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모든 것들이 지금은 멈춰 서 있다. 코로나라는 커다란 구덩이를 만난 오도 가도 못하고 멈춘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흐르고야 마는 우리의 삶처럼 구덩이가 차 오르면 다시 평평함을 회복하고 마침내 흐르게 될 것이다. 물이 차오르는 것은 눈에 보이는 특별하고 색다른 그 무엇에 의한다기보다는 『장자』이야기 속에 흐릿하여 보이지 않는 상망(象罔: 흐릿한 형체)에 의해 진리가 밝혀지는 것처럼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을 잠시 멈추고 다만 자연의 순환에 모든 것을 맡기면(마땅히 기다리고 있으면) 진리는 슬며시 드러나게(패인 곳이 차 올라 마침내 흐르게) 되는 것이다.
* 九人: 아홉 구 자는 여럿, 혹은 많다는 의미로도 쓰임,
* 생성과 소멸은 같은 몸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하여 글을 씀.
* 象罔得玄珠: 상망이 현주를 얻음. 『장자』 천지 편에 나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