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식 May 21. 2020

흐린 날 혼잣말

曇日獨白(담일독백)


霒日境雨淸 (음일경우청) 구름 낀 날은 비와 맑음의 경계니,

詩情緣界發*(시정연계발) 시정은 그로부터 생겨나는구나. 

心中本洞如*(심중본동여) 마음은 본래 동굴 같으니,

不易亦寫像*(불이역사상) 생각 옮기기 또한 쉽지 않아라.


2020년 5월 21일 오전. 흐린 날. 여전히 아이들이 없는 학교는 한 없이 고요하고 적막하다. 비가 오지는 않을 듯한데 역시 화창하게 갤 것 같지도 않은 날씨다. 그 절묘한 경계 사이에 내가 있다. 늘 이러한 경계로부터 갈등이 온다. 갈등은 대부분 사물이나 상황의 끝에서 생겨난다. 갈등은 경계지점에서만 관찰되는 일종의 절차일 수도 있다. 나와 내가 만나는 교차지점에서 내적 갈등이 생겨나고, 나와 타인, 혹은 외부와 만나는 지점에서 또한 외적 갈등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늘 무의미하다. 뫼비우스 띠처럼 외적 갈등은 내적 갈등으로 다시 내적 갈등이 외적 갈등으로 옮겨 다닌다. 


시에 쓰인 경과 계를 붙여 ‘경계’가 된다. 그런데 이 ‘경계’라는 말은 사실 매우 복잡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특별히 미학적 ‘경계’란 ‘意境’, ‘物境’, ‘心境’, ‘藝境’ 등 여러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위 글에서 경과 계는 시정이 생기는 곳이니 ‘의경’이나 ‘심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불교에서 자주 쓰이는 세계라는 말의 뜻 속에는 여기서 말하는 ‘경계’의 의미가 짙다. 이를테면 능엄경 등에서 말하는 세계는 곧 경계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 당나라 시인이자 승려였던 교연의 시 秋日遙和盧使君遊何山寺宿敡上人房論涅盤經義(추일요화로사군유하산사숙이상인방론열반경의)에서 차운함. 


* 역시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인 유종원의 시 禪堂(선당)의 의경을 용사함. 


* 寫像(사상):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책 이름인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Vorstellung을 번역하자면 이 말에 가깝다. 하지만 대부분 ‘표상’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영어로 번역하면 상상력(Imagination)이지만 쇼펜하우어가 책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Vorstellung의 의미로는 보기 어렵다. 영어 Presentation으로도 번역이 되기도 하는데 Vorstellung의 의미를 모두 담아내지는 못한다. 사상 역시 비슷할 뿐이다. 오로지 나의 견해로는 쇼펜하우어가 사용한 Vorstellung은 ‘의식의 다양한 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나 태도’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우두커니 서서 바라 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