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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May 22. 2020

끝이 없는 근원에 몸을 숨기니.

藏乎無端之紀*(장호무단지기)


無風卽時俛 (무풍즉시면) 바람 없어도 때 되니 수그리고,

化彩不感本 (화채불감본) 모양 바뀌니 근본은 알 수 없어라.

生滅聯結熟 (생멸연결숙) 맺히고 익어 감은 나고 사라 짐인데, 

自適外六道*(자적외육도) 육도 밖에 있으니 자유로워라,


2020년 5월 22일 점심시간. 학교 주위를 산책하다가 얼마 전 거센 바람 불던 밀 밭을 보니 이제는 누렇게 익어서 수확을 기다린다. 바람 따라 눕던 줄기와 이삭들이 이제는 바람 없이 고개를 숙인다. 거대한 질서 가운데 있음이다. 마지막의 육도 밖이라 함은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식물은 육도 윤회의 밖에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윤회전생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하기야 그렇지 않으면 식물을 먹는 것(죽이는 것) 또한 윤회전생을 끊어버리는 것이니 엄청난 죄가 될 수도 있으니 부처께서 미리 장치를 해 놓으신 것이다. 우리가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도록 말이다. 하지만 식물이 마냥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동물을 조종하는 존재가 식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단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육도 윤회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논리적 오류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밀밭은 누렇게 익어가면서 인간에게 명령한다. “빨리 수확해라!”  


* 『장자』 달생에 등장하는 말이다. 藏乎無端之紀(장호무단지기): 끝이 없는(원인 없는, 혹은 알 수 없는) 근원에 몸을 감춤. 재유에 나오는 무단의 뜻(끝없는 경지)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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