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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n 24. 2016

5. Le Gouffre(틈) 1861

불안한 세계를 대처하는 자세

Le Gouffre, 1861. Oil on canvas, 125cmⅹ212cm

Paul Huet(폴 위에)의 , Le Gouffre(틈) 1861


땅이 갈라진 검고 깊어 보이는 틈새가 화면의 중심에 있다. 지상에는 바람이 불어 나뭇잎의 흔들림이 느껴지고 긴 나무는 휘어져 있다. 하늘의 구름으로 보아 비가 내렸거나 혹은 비가 내리기 전의 을씨년스럽고 음산한 풍경이다. 


두 명의 남자가 들판을 지나가다 동굴의 입구 같은 틈새를 발견하고 한 남자는 개를 데리고 그 틈새를 살피고 있다. 전체 그림의 크기와 비교해서 말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지만 말의 갈기와 역동적인 자세가 매우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낭만주의 회화의 시작점에 위치한 이 그림은 이전의 회화가 가졌던 인물 중심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풍경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학자들은 여기가 바르비종파의 산실 ‘퐁텐블로’ 숲이라고 하지만 Huet가 그린 숲과 풍경은 바르비종파의 ‘퐁텐블로’ 숲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바르비종파들이 그린 숲은 수평선을 중심으로 그 위의 세계를 그린 것이라면 이 숲은 수평선을 화면 가운데 놓고 위 · 아래를 동일한 비중으로 묘사하려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평의 밑에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Paul Huet(폴 위에, 1803~1869)는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었다. 그는 ‘Bonaparte at the pontd’Arcole(아르콜 다리 위의 보나파르트)’를 그린 Antoine-JeanGros(안토닌 장 그로)의 영향과 Pierre-NarcisseGuérin(피에르-나르시스 게랭)의 영향을 받아 그림 공부를 시작했는데 장 그로의 화실에서 당시 영국의 풍경 화가였던 Richard Parkes Bonington(리처드 파르 케스 보닝턴)을 만나게 된다. 


20대의 Huet에게 영국의 풍경화는 매우 큰 감명을 주었고 이러한 탓에 위에는 당시의 미술 경향이었던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를거부하고 풍경화가로 경도되게 한 원인이 된다. 당시 영국에는 JohnConstable(존 컨스터블)이라는 걸출한 풍경화가가 있었는데 컨스터블의 모든 것이 Huet 의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Huet 가 50대 후반의 일이었는데 이때 이미 파리의 화단은 바르비종파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던 시절이었다. 이미 낭만주의는 쇠퇴하여 초기의 디오니소스적인 감상과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자유분방함(이성적 계몽주의에 반발하는)은 스러지고 색채와 색조 그리고 질감 등, 인간의 감각적 자극에 대부분을 의존하는 인상주의 회화로 전이되는 그 시절, Huet는 초기의 낭만주의 회화가 가지고 있던 격정과 분노, 격렬함, 인간 내부로의 관심 등이 그대로 살아있는 회화를 이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Huet 의 작품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국의 풍경화, 특히 컨스터블의 영향을 받은 듯 불투명한 풍경이다. 컨스터블의 대표작 난파선은 거친 폭풍우가 몰아치는 파도와 그위에 펼쳐져 있는 누런빛의 하늘이 주조를 이루는데 Huet는 이러한 컨스터블의 화풍을 그대로 자신의 그림에 인용하게 된다. 이런 화풍은 당연히 당대의 비평가들(이미 낭만주의는 퇴조하고 인상파로 옮아가는 시기의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지만 Huet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대로 그림을 그렸다. Huet는 이 그림에서 그러한 낭만주의적 특성을 그대로 살려 인간의 심연(深淵)에 존재하는 갈등을 숲과 동굴, 하늘과 바람이라는 대상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Huet의 정치적 성향은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1830년 7월 혁명에 참여한다. 1824년 루이 18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샤를 10세는 프랑스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으로서 즉위하자마자 입헌 정치를 철회하고 다시 구제도로의 복귀를 꾀하는 극단적인 반동 정책을 표방하더니, 1830년 7월 25일 소위 ‘7월 칙령’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출판 자유의 정지, 하원의 해산, 선거 자격의 제한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은 바로 7월 혁명의 기폭제(起爆劑)가 되었다. 이 혁명에 30대의 열혈 청년 Huet는 공화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심연(深淵)은 화면의 중심에 있는 검은 동굴처럼 ‘불확실함’이고 그림의 두 명의 남자 중 한 남자는 동굴 입구에서 아래쪽 동굴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물론 사냥개가 주인을 말리지만 남자는 동굴로 들어가 보기라도 할 태세다. 


Huet 본인이 가지고 있던 인간 내면에의 관심이 한 남자로 대신하여 이렇게 표현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 혹은 Huet 가 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 땅이 갈라진 틈으로 관심을 보이는 저 남자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혁명의 과정에서 Huet 가 느꼈던 인간의 불안한 심리가 예술로 승화되어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장자 이야기


불안한 세계를 대처하는 자세


장자는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의 불안과 절망의 시대를 살면서 그 시대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한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집중하게 된다. 이 절대적 위기에서 장자가 발견한 것은 ‘자유’였다. 

장자의 자유는 불교나 기독교와는 다른 철저한 현실주의, 현세주의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선악의 가치판단을 초월한, 그저 아무렇게나 이 세상에 내던져진 하나의 생명인 인간 존재의 문제로,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을 통한 절대적 자유나 기독교의 교리대로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제 가능한 자유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 자유는 신의 섭리를 바탕으로 하기는 하지만 인간 이성에 더 중점을 두고 그 이성의 발견으로부터 출발한 근대 실존주의 철학과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 처음부터 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완전한 ‘인간의 자유’였다. 


또,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바탕한 근대 유럽의 사상과 그것을 기초로 하는 합리주의와도 달랐는데 장자의 자유는, 논리와 이성을 초월한 중국의 고대 사상문화에 기반한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이를테면 인간을 우주적 존재로 파악하는 것)과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인간의 자유를 찾으려 했다. 


뿐만 아니라 분석적, 추상적, 논리적, 법칙적인 사고가 아닌 전체적이며 동시에 구체적이고 직관적이자 동시에 체험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 장자적 사고의 기반이다. 장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며, 법칙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 


장자에게 중요한 것은 주체적인 자유다. 즉, 인간이 어떤 이론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실천하고, 어떤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더 우선시했다. 왜냐하면 장자의 시대는 절체절명의 전시 상황이었고 일단은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당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자는 그의 삶에서 이러한 절대적 자유를 부드러운 예술의경지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의 삶, 도처에 흩어져 있는 위험과 불안을 진지한 삶의 철학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그것을 시적인(예술적인) 경지로 치환하였다. 따라서 장자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장자적 예술은 불안의 세계에서 탐구된 자유의 표현이다. 


장자 소요유,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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