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명상

by 김준식


비가 오다가 이내 멈추고 그러다가 다시 쏟아진다.


안개를 머금은 산은 나로부터 이 만큼 가깝다가 또 저만큼 멀어진다.


혜공은 늘 장주의 이야기에 딴지를 건다. 그런데 딴지의 제왕인 혜공이 한 이야기는 더 가관이다.

혜공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南方 無窮而有窮”(『장자』天下)


한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남쪽은 끝이 없지만 남쪽의 끝은 있다.”


무슨 말인가? 이를테면 혜공은 끝없이 펼쳐진 남쪽을 보면서도 분명 그 남쪽의 끝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수학적인 개념, 즉, 극한이나 미분의 개념이 스며든 사고 같기도 하다. 거의 이 천년 전, 혜공이 살았던 시절에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사고의 한계와 범위를 초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난해하고 동시에 복잡한 이야기가 당시에 혹은 지금, 무슨 쓸모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불현듯 모호해진다.


역시 같은 이유로 곤(鯤)과 붕(鵬), 뱁새와 황새, 나비와 꿈 이야기를 한 장자의 이야기도 모호하고 또 모호하다. 다만 혜공이나 장자가 이런 이야기조차 남기지 않았다면 전쟁이 삶을 송두리째 흔들던 이 천년 전이나 어지러움과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한 지금, 지극히 넓고 고요하며 광막한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어찌 느껴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실 쓸모 있는지 없는지 누가 판단할 것인가?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世界)는 존재의 형식이다. 무슨 뚱딴지같은 존재와 세계인가? 역시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언어, 이를테면 목소리를 통해 외부로 표출되는 각종의 말은 이미 그 이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을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순간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치밀하게 규정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렇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필요성은 도대체 어느 곳에 쓰이는 필요성인지 여전히 우리는 알지 못하고, 혜공의 이야기나 장주의 이야기에서 그 필요성을 역시 우리는 알지 못한다. 미세하고 더욱 미세한, 세계라는 존재형식에 대한 하이데거의 고민에 대해서도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비를 보며, 날씨를 느끼며 하루를 보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유채훈이라는 테너가 엄청난 에너지로 노래한다. 노래 제목은 일 몬도(Il Mondo, 세계)인데 몇 년 전 영화 어바웃 타임이란 영화에 삽입된 노래다.


그림은 위대한 영국 화가 J.M.W.Turner 의 Raby Castle, the Seat of the Earl of Darlington 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uGXFe_ae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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