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날이 뜨거워진다. 오전 9시 24분인데도 멀리 내다 보이는 산 빛은 더위에 지쳐 보인다. 일주일 동안 직장에 출근하고 주말을 쉬는 이 오래된 제도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한 우리는 늘 다하지 못한 일을 주말로 미루곤 한다. 하지만 막상 주말이 되면 그 일을 처리하기에는 몸과 마음의 태세가 느슨해져 다시 알 수 없는 특정한 시간으로 그 일들을 연기하곤 한다.
이 자유로운 주말 아침, 승용차로 한 시간 가까이 달려가면 분명하게 만날 수 있는 능소화를 가볍게 포기한다. 이유야 몇 가지 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다. 50대 후반의 약점은 진행방향을 바꾸는 것이 약간 어렵다는 것이다. 가볍게 능소화를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왠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않은 것을 숨길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 능소화 대신에 부여된 것은 조용한 아침 시간이다. 내놓는 것과 얻는 것은 항상 비슷하다. 완전한 일치이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수 있다.
코로나로 가끔씩 해 오던 외부 강의 기회가 거의 사라졌다. 며칠 전 8월 방학 중에 강의 요청이 있어 러시아 낭만주의 미술을 강의하겠다고 막연하게 대답했다.
러시아 낭만주의라!~
Mikhail Lermontov(1814~1841)라는 러시아의 시인이 있다. 결투로 해서 유명해졌고 결투로 인해 젊은 삶을 마감한 레르몬토프의 삶 자체가 낭만의 요체인 ‘격정’ 그 자체였다. 귀족의 신분으로 태어난 레르몬토프는 반항적 삶이었다고 보기에는 조금 모호하지만 체제 안정적인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이미 15세 이전부터 수많은 문학작품을 써온 그는 우여곡절 끝에 군인이 되었고 결투로 인한 푸시킨의 사망 배경을 러시아 전제정치의 모순으로 묘사했다. 그 작품이 레르몬토프가 23세에 쓴 Death of the Poet(1837)이었다. 레르몬토프는 영국의 위대한 시인 바이런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짧은 인생 동안 줄곧 써 왔던 Demon(악마, 1841)은 그의 대표작이자 유작이 되었다.
악마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인 개념에서 출발한다. 신의 영역에 존재하다가 추방된 신적인 능력의 소유자, 악마라는 존재 자체가 벌써 모순이자 부조리다. 당연한 결과로 악마는 모순과 부조리의 토양에서 성장하고 번성한다.
그러면 순수한 선과 악은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선과 악을 구별해 낼 수 있으려면 선과 악으로 구분되기 이전의 시점이나 관점에 위치해야만 하는데 이미 그 판단 하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관점으로는 선과 악의 구분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레르몬토프가 상정한 악마는 현실세계의 부조리를 타파하고 현실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혁명적 영웅의 표현으로 비친다. 한편으로 악마는 신의 영역에서는 외면받고, 그 밖의 영역에서는 공포와 불안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그리하여 마침내 절망 속에서 꿈조차 꺾여버린 처절한 頹廢(퇴폐)의 존재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 기막히고 이중적인 악마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사람이 러시아 낭만주의 미술의 대가 Mikhail Vrubel(1856~1910)이다. 브루벨은 엄격하게 본다면 아르누보 계열이거나 상징주의 화가로 분류된다. 그 이유는 ‘악마’라는 소재는 아르누보와 상징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림을 보자.
이 악마는 브루벨의 좌절에서 탄생한 것으로서 아르누보의 핵심적 가치인 이중성에 기초한다. 신이면서 악마이고,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성성을 느낄 수 있는 브루벨의 악마는 아르누보의 이중적 이미지와 대체적으로 부합한다.
19세기 중반에 태어나 20세기를 경험한 브루벨이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890년이다. 세기말의 암울한 그림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화가 자신의 암담한 처지와 키릴 성당 복원사업의 주요한 제안에서 탈락한 지극히 개인적인 좌절이 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브루벨은 보라색을 즐겨 쓰는 화가다. 보라색은 괴테에 의하면(괴테 색채론, 1810) 애매함 또는 모호함(Unklarheit)으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그림에서 빛과 어둠, 연민과 반항, 비극적 고통과 절묘한 희망의 모호한 위치를 보라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 그는 괴테의 숭배자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 그림 속에는 러시아 전통의 이콘화와 모자이크화가 스며 있고 저 멀리 르네상스의 전통조차 숨 쉬고 있다. 한 때이기는 하지만 브루벨은 사실주의 화가로 활동한 적도 있다. 러시아 사실주의는 그 뒤 혁명의 성공으로 러시아 주류 화단으로 성장하지만 브루벨 당시의 세로프(Valentin Serov)나 레비탄(Isaac Levitan)은 자연의 성실한 묘사에 방점을 둔 화가들이었다. 물론 브루벨은 그 뒤 사실주의의 경로를 벗어났지만 배경으로 보이는 석양, 악마 얼굴의 묘사에서 사실주의의 희미한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또 다른 그림 ‘타마라와 악마’(역시 레르몬토프의 악마 연작)에서 그런 경향이 선명한 부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