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설명함에 있어 대화를 통한 의사전달의 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예가 매우 많다. 불경이 주로 아난타의 기억에 의존하여 서술되어 대부분의 불경 첫머리는 如是我聞(여시아문: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으로 시작된다. 여시아문에 이어서 부처와 아난타의 질문과 답변이 주요한 내용을 이룬다. 유교 경전에서는 대부분 ‘~자’ 왈로 시작되는데(불경의 방식과 유사하다.) 제자가 공자(공자를 제외한 인물들은 ‘자왈’이라고 쓰지는 않는다.)와 나눈 이야기를 옮긴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부처나 공자의 직접적인 이야기보다는 대화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대중들에게 다가서는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을 것이다.
『장자』 역시 대화를 통해 ‘장자’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불경이나 유교의 경전과 차이가 있다면 서술의 주체가 인간 ‘장자’를 주어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장자’ 자신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다른 인물들이 이야기하거나 또는 대화함으로 그 뜻을 나타낸다.
다만 대화의 방식은 유교나 불교의 경우처럼 상반되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대화가 아니라 도를 이룬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넌지시 도를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용한다.
『장자』 에서 등장하는 대화의 주인공들을 살펴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장자』 제물론의 주요 대화는 南郭子綦(남곽자기)와 顔成子游(안성자유)가 나누는 긴 대화가 주된 내용이다.
『장자』 인간세에서 대화의 주인공은 顔回(안회)와 孔子(공자: 여기서 주의할 점은 『장자』 전편에 등장하는 공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가 맞기는 하지만 유교에서 성인처럼 받들어 모시는 그 공자와는 사뭇 거리가 있다. 아마도 ‘장자’는 이런 방식을 통해 유교적 세계관을 은근슬쩍 공격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세에는 또 葉公子高(엽공자고)와 孔子, 顔闔(안합)과 蘧伯玉(거백옥) 대화가 등장한다.
『장자』 양생주에서는 포정이 문해군과 대화를 한다.
『장자』 대종사에는 南伯子葵(남백자규)와 女偶(여우)의 대화가 있고 자사, 자여, 자리, 자래, 자상호, 맹자반, 자금장의 대화가 등장한다. 마지막쯤에는 안회와 공자의 대화가 있다.
『장자』 응제왕에는 혼돈, 숙 홀이 등장하여 대화를 한다.
『장자』 천운에서는 공자와 노자의 대화가 등장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기서 공자는 노자 중에서 공자는 도에 이르지 못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장자』 천도에서는 유명한 齊 桓公(제 환공)과 수레바퀴 깎는 輪扁(윤편)의 대화가 등장한다.
『장자』 전자방에는 田子方(전자방)과 魏 文侯(위 문후)의 대화가 나오고,
『장자』 서무귀에는 역시 너무나도 유명한 ‘장자’와 혜시의 대화가 있다.
『장자』 도척에서는 子張(자장)과, 滿苟得(만구득)의 대화가 등장하며 無足(무족)과 知和(지화)의 대화가 나온다.
『장자』 어부에서는 공자와 어부의 대화가 나오는데 어부가 도에 이른 사람으로 등장한다.
『장자』 열어구에는 陽子居(양자거)와 老聃(노빙: 노자)의 대화가 있고 列禦寇(열어구)와 伯昏瞀人(백혼무인)의 대화가 있다.
이렇게 많은 대화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진리를 아예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자본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세력들이 만들어내는 거짓과 왜곡의 시대를 산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세력과도 제휴하고 누구든지 한 통속을 만든다. ‘진리! 흥! 개나 주라 그래!!!’의 사고방식이다.
가장 진리를 소중히 해야 할 교육의 현장에서도 진리는 없고, 편 가르기와 자본이 만들어 놓은 틀(이른바 프레임)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본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귀를 열지 않는다. 눈도 뜨지 않는다. 이유는 자명하다. 이야기하는 우리는 자본도, 권력도, 그 아무것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리가 진리의 편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으니 그들을 욕할 수도 없다. 이 혼돈 자체가 벌써 자본의 위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