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수업(9)

Tabula rasa

by 김준식

월요일 아침 아이들과 수업을 하며 느낀 감상을 옮겨 쓰면서 교사 시절 여유가 있었더라면 이런 일기를 30년 정도 썼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교사 시절 하루에 3~4교시의 수업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나 상황을 글로 옮길 여유가 전혀 없다. 교사도 사람이니 수업 후에는 좀 쉬어야 하고 일과 후에는 그 수업 장면의 복귀가 매우 어려워진다. 물론 간혹 탁월한 선생님들께서는 그런 종류의 작업을 하시고 또 그 결과물을 책으로 펴내 시기기까지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저번 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써 보고 발표하는 시간이다. 저번 시간 이야기한 내용이 바로 ‘현상과 본질’이었는데 약간의 이야기를 한 후 내어 준 질문지에 써 보고 두어 명 학생들에게 발표까지 들었다.


2300년 전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De Anima(영혼에 대하여, c. 350 BC.)'에서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타불라 라사’라는 이야기를 처음 꺼낸다. ‘Tabula rasa’ 란 ‘clean slate(빈 석판)’이라는 뜻의 라틴어인데 여기에는 단순히 '비어있다'라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가 숨어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세상에 알린 사람들 중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은(이견은 있다.) 놀랍게도 페르시아의 철학자 ‘이븐 시나(아비 체나, 푸르시나로도 불린다.)였다. 그는 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재해석하여 ‘타불라 라사’를 이렇게 풀이했다. “인간의 지성은 태어날 때부터 빈 석판과 비슷하여 교육과 개인이 알게 될 내용에 의해 작성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전 시대의 스토아학파의 주장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 쓰일 수 있는 빈 종이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라는 말의 재해석일 수 있지만 이븐 시나의 말은 그 후의 많은 철학자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음에 분명하다.


오늘 현상과 본질에 대하여 탐구 해 본 주제는 여섯 가지였다.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꽃, 우정, 학교, 가족, 평화, 전쟁’에 대하여 본질을 생각하고 가능한 문장으로 쓰는 것이 수업의 핵심이었다. 아이들은 어려워하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위의 타불라 라사 이론에 의하여 이들은 이미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아이들이 써 놓은 것을 보며 오히려 내가 생각이 많아진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타불라 라사는 기독교의 교의에 편입되었고 이것은 非플라톤적인 사고로서 그 후 보나벤투라와의 지적 투쟁의 중요한 지점이 된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이 타불라 라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는데 그 변곡점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존 로크이다. 로크는 그의 책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인간 지성론)에서 타불라 라사를 단순하게 ‘백지’라는 개념으로 연결시킨다. ‘백지’란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의 이미지가 강하다. 앞 서 이야기한 이븐 시나의 선험(즉 잠재 의식)을 싹 빼버리고 오로지 경험에 의해서만 채워지는 것으로 풀이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나의 이론에 근거하는데 이를 테면 아이들은 이미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고 생각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쪽에 조금은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을 두고 수업을 한다.


*아이들이 적은 내용.(정답은 없다고 아이들에게 미리 이야기했다.)


1. 현상인 '꽃'의 본질 - 씨앗, 토양, 햇빛, 자연, 식물, 세포, 아름다움, 향기

2. 현상인 '우정'의 본질 - 존중, 이해, 배려, 친밀감, 확신, 관계, 유대감, 정, 동행, 사람, 대화, 믿음

3. 현상인 '학교'의 본질 - 공부, 학생, 선생님, 건물, 시멘트, 철골, 배움, 행복, 즐거움

4. 현상인 '가족'의 본질 - 집단, 관계, 사랑, 포근함, 평화, 사람, 혈연, 부모님

5. 현상인 '평화'의 본질 - 편안함, 폭풍전야, 안정, 행복, 안전, 고요

6. 현상인 '전쟁'의 본질 - 투쟁, 상처, 억눌림, 공포, 갈등, 대립, 무자비, 무기, 욕망, 불만


사실 거의 연상되는 단어 찾기에 가깝지만 아이들에게 그것 조차도 매우 신선한 경험이었다. 발표한 아이는 발표하면서 자신의 논리에 모순이 생겨 매우 고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