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수업(10)

변화하는 사물

by 김준식

제3 절 세상은 변하지 않을까?


1. 흐르는 강물


우리는 물이 흐르는 것을 늘 본다. 학교 주변의 논과 그 사이사이에 있는 작은 개울에서 언제나 물은 흐르고 있다. 그 물들이 모여서 좀 더 큰 개울을 만들고 그것이 모여 다시 강으로 흘러간다. 강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거의 변하지 않는 진리다. 또 하나의 진리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강물은 잠시 전과 다른 강물이고 어제의 강물과 전혀 다른 물이다. 항상 새로운 물이 흐르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 에페소스(현재는 터키 영토) 출신의 Heraclitus(헤라클레이토스, 535 ~ 475 BC.)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즉 지금 내가 보는 강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강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장마철에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거나 또 가뭄이 오면 강에 흐르는 물의 양이 달라서 강의 외부적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강물은 언제나 그곳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흐르고 있다.


여러분들의 변화도 생각해보자.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의 귀엽고 예쁜 모습의 여러분들이 이제 중학생이 되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단 하루도 같은 모습으로 살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는 늘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이를테면 변화는 있으나 잘 알아차릴 수 없는 변화가 항상 나에게도, 또 세상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잘 알아차릴 수 없지만 분명하게 변화하고 있는 모든 것은 계획된 일인가? 아니면 자연스러운 일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자연스럽다’는 표현은 특별한 원인을 밝힐 수 없을 때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과연 세상의 모든 일들은 자연스럽기만 한 걸까? 반대로 나타난 결과 하나하나가 모두 원인으로 연결되고, 그 원인은 또 다른 일의 결과가 되며 그 결과 또한 다시 원인이 되는 그야말로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짜인 듯 모든 일이 계획되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정교해서 또는 너무나 잘 짜여 있어서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2. 변화를 다스리는 것


정확하게 ‘다스린다’는 말속에는 통제(control)를 포함한 조정(adjustment)과 실행 혹은 시범(simulation)의 의미까지도 포함된다. ‘통제’의 뜻은 ‘일정한 방침이나 목적에 따라 행위를 완전히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범위를 정해 놓고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통제’다. ‘조정’은 ‘어떤 기준이나 상황에 맞도록 조절하거나 고르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시범’은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특정한 일의 방향과 목적을 알려 주는 것이다.


식물의 새싹이 자라지만 모든 새싹이 무한히 커지는 것은 아니다. 각각 계획된 만큼만 자라고, 역시 이미 계획된 형태(모습)로 자란다. 이를테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지극히 분명한 원칙에 의해 변화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분명한 원칙은 무엇에 의해 다스림(통제, 조정, 시범)을 받고 있을까? 식물 내부에 통제의 장치 혹은 정보가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외부의 특별한 요건이 또 다른 통제의 장치일 수도 있다. 만약 외부의 특별한 요건이 통제의 장치라면 이 많은 생명체 모두를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입장에서 본다면 각 생명체는 스스로 그 통제 요건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전)


우리는 늘 살아오면서 이 통제와 조정, 그리고 시범 혹은 실행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변화과정을 별 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다스림의 주체를 생각해보는 순간 우리 주변의 변화를 감지하게 되고 그 변화의 방향과 목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3.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위에서 말한 ‘헤라클레이토스’가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변화가 너무 많고 변화의 속도도 엄청나게 빠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의 느낌처럼 지극히 수동적으로 변화를 보는 시대는 이미 아니다. 지금의 우리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여도 변화의 속도를 따라 잡기가 어렵다.


새로운 기계, 새로운 제도, 새로운 관계들이 매 순간, 매일 생성되고 소멸한다. 우리는 그 변화를 거의 따라잡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화를 따라잡는 것보다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다. ‘따라잡는 것’은 변화는 이미 발생하였고, 그것이 외부로 나타났을 때 우리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변화를 ‘감지’한다는 것은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 혹은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아는 것이다.


변화를 감지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개개의 사물로부터 전체적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변화를 전체적으로 보는 능력과 더불어 이전의 변화 사실을 충분하게 수용하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추론해낼 수 있는 능력까지도 포함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보아온 위대한 선각자들이 가진 능력이 바로 이 변화를 감지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우리가 이러한 능력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변화를 수용하면서 다양한 생각과 노력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유추해내는 능력은 조금씩 이기는 하지만 키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변화를 다스리면서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변화는 너무나 다양하고 여러 방향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특정의 변화를 수용한다고 해서 모든 변화를 모두 동시에 수용할 수는 없다. 객관적 자세를 유지하며 다양한 변화를 통찰하는 능력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통찰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먼저 모든 사물에 대해 항상 ‘의심’을 가져야 한다. 의심이라 하니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한자 ‘疑(의)’는 걱정의 뉘앙스가 크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걱정이 바로 ‘疑’다. 좀 더 확대 해석하면 타인의 행위에 대한 불신의 의미보다는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는 성찰의 의미로 재해석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의 기초가 되는 스스로의 지식을 ‘의심’하고 외부의 새로운 것에 대해 ‘의심’하며 비교와 논증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구축하고 새로운 대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의심’이 가지는 본래 의미이다. 그러한 의심을 바탕으로 나로부터 일어나는 변화를 되짚어보고, 역시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외부 변화를 감지하고 파악하면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할 변화와 그렇지 않아도 되는 변화는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