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5.

by 김준식

1. 슬픈 세대


내가(50대 후반, 농촌 출신인 나를 기준으로 한다.) 어릴 적 동네 어른들의 말씀은 우리에게 행동의 기준이자 준칙이었다. 그분들은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경험을 통해 차곡차곡 쌓아온 사실과 그것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을 적절한 예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었고, 그것들은 거의 대부분 사실에 잘 들어맞았으며 심지어 약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도 했다. 조금 불친절하고 또 잔소리 같아도 우리는 그 말들의 무게를 충분히 수용했다. 당시에는 저 나이가 되면 우리도 그런 존재들이 될 줄 알았고 그런 세상이 유지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사이 세상이 달라지고 말았다. 이제 어른들은(우리 세대와 우리 윗 세대) 더 이상 경험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경험은 사실 쓸모가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러한 경험은 벌써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이야기를 넘어 이제 ‘어제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데 어른들의 경험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농업사회와 산업사회를 살아온 세대들이 이제 각 직장에서 정년을 맞이하고 있다. 그들은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몸속 깊이 농업사회와 산업사회의 인식의 틀이 지배하고 있다. 정년, 그리고 퇴직을 한 그들의 정신은 정보화 사회에서 더 이상 효용을 찾기 어려운 농업 혹은 산업사회의 향수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문득 어른이 된 그들과 그들의 윗 세대들은 이전 시대의 향수에 시달리며 현실을 원망하기도 하고 더러는 체념하기도 한다. 아주 일부는 지금 세상을 따르기 위해 변신을 시도하지만 젊은 시절의 에너지와 열정은 이미 없다. 가볍게 좌절한다.


막상 이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은 어른들은 이제 자신의 역할에 혼선이 생기기 시작한다. 기준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준칙은 언감생심이다. 그러한 정신적 혼선은 그들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함부로 화내고 함부로 이야기하며 함부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미 자신들에게 향하고 있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인정하는 척하는 사람들을 함부로 신뢰하고, 그들이 이상한 논리에 기초한 사실들을 적절하게 버무려 진실을 왜곡하여도 대충 눈 감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나마 자신들의 존재가치가 인정되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만들어 놓은 논리의 함정에 빠져 대변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위해 열정과 에너지를 쏟는 아이러니를 몸소 실천하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안타깝다.



2. 후안무치


의사들이 파업을 하고 종교적 가면을 쓴 무리들이(이 무리 중에 위에서 말한 그 세대들이 포함되어 있다.) 전염병을 다시 확산시키고, 그 무리의 주동자들은 이러한 책임을 정부에게 전가하는 전무후무의 후안무치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난다.


또 의사 무리들에게 굴복하다시피 한 정부의 합의안을 보면서도 짜증이 나고, 그것을 다시 지키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 무리들에게 분노한다.


어떤 집단은 7년 만에 겨우 받아 든 ‘노조 아님 통보 취소 판결’에 눈물을 흘리는 판인데 말이다. 이 지긋지긋하게 불편한 모든 사실 바닥으로 남루한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 그리고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왜곡되고 뒤틀린 우리의 슬픈 근대사가 실체를 드러낸다.


더욱 한심하고 비루한 현실은 이 허위와 배신, 왜곡의 변주곡을 저들의 입맛대로 편집하여 대중들에게 중계하는 미친 언론들이다. 요즘은 유튜브라는 수단이 더 지배적이다. 현재 그들은 미치도록 바쁘다. 이 모습이 이 나라의 참모습은 분명 아닐 것인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희미하게 그 모든 것을 묵인하는 분위기가 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외면이다. 외면하는 우리들 속으로 흐르는 감정은 자괴감과 불쾌함, 그리고 난감함이다.



Eugène Delacroix의 Massacre at Chios(키오스의 학살)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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