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하여
존재에 대하여
역시 아이들에게 매우 어려운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존재’라는 말 자체가 가져다주는 위압감이 아이들의 생각을 가로막는다. 지식 교육의 최대 맹점은 분별 만을 강조할 뿐, 속성의 이해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속성에 골몰할 만큼 우리 교육과 사회가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감각’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전제조건인 ‘감각’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眼耳鼻舌身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감각, 즉 視聽嗅味觸에 대한 이야기는 아이들이 잘 알아듣는다. 그리고 감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혼란스럽다. ‘사랑’, ‘우정’, ‘믿음’, ‘자유’……. 등에 대한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의 너머에 있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언제나 느끼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이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나 이야기는 어려움을 느낀다. 당연하다. 보지 않은 것, 생각하지 않은 것을 쉽게 떠 올릴 수는 없다. 하지만 철학 교육의 출발은 바로 거기에 있다. 보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존재’와 ‘존재자’ 이야기를 방편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지금 학교 주변에 비닐을 사용하여 볏짚을 둥글게 말아놓은 것들이 많다. 그 말아놓은 볏짚은 ‘존재자’이다. 그 볏짚을 보면서 볍씨, 어린 모, 벼 이삭, 트랙터, 추수의 상황을 떠 올리는데 그 각각이 ‘존재’(시간의 경과로 이미 우리의 감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다. 더불어 벼가 자라는 당시의 날씨와 성장의 과정에서 확인되는 모든 것이 역시 ‘존재’다. 왜냐하면 ‘존재자’가 그 모든 ‘존재’를 증명하고, 동시에 각각의 ‘존재’가 현재의 ‘존재자’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알쏭달쏭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것이 맞다. 정확한 것은 설명하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이야기를 90분 안에 다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아이들을 더 혼란스럽게 할 수 없으므로 아주 간단하게만 설명하였다. 좀 더 솔직하자면 나 자신도 이 이상의 이야기를 해 줄 능력이 없다.
유난히 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수업을 마친 아이들을 보며 나의 부족함에 약간의 자괴감이 말려 오지만 이러한 자괴감 역시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공부해야 하고 좀 더 나은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방향에 대한 끝없는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