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식 Nov 14. 2016

일상의 충돌

뫼비우스 띠 처럼 혼재된 시간의 연속선, 그리고 현실

지난 주말 100만이 모인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아침 뉴스를 들으니 한 숨이 절로 난다. 저 철면피들은 저들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이제까지 해 오던 것처럼 구렁이 담 넘듯 이 사태를 넘어가려 한다. 문득 지난 2014년 11월 경에 상영된 영화 인터스텔라가 떠오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너무나 싫다. 문득 먼 우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 듯 다가오다가도, 


“아니다!!”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참 어중간한 표현이다. 우린 이길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이런 생각과 함께 스스로 단단한 각오를 다지며 다시 정권 퇴진의 희망을 품는다. 

영화 “인터스텔라” 


뫼비우스 띠 처럼 혼재된 시간의 연속선, 그리고 현실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 시의 프레겔강(江)의 7개의 다리를 건너는, ‘다리 건너기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 저 유명한 오일러의 공식이다. 이 오일러의 공식은 약간의 편차를 가지고 있지만 위상기하학의 ‘위상’의 정립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위상기하학의 다양한 연구 중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의 문하생이었던 아우구스토 뫼비우스가 연구한 뫼비우스 띠가 있다.


뫼비우스 띠, 중중무진


시간이라는 독특한 명제에 대한 해석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거나 혹은 불명확하다는 가정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과 그 공간을 관통하는 시간의 흐름은 3차원의 개념들로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지만 우리의 한계가 3차원이므로 설사 그 이상의 설명이 있다 하여도 현재의 우리로서는 이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 어렵고 불투명한 시간을 바닥에 깔고 영화는 전개된다. 그것도 은하 사이(Inter Stella)라는 제목을 걸고 장장 3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는 이 시간의 문제를 깊게 그리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관객들을 설득하고 있다. 


중중무진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의 속성이다. 연기란 간략하게 말한다면 원인과 결과 정도인데 그것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는 것이다. 서양적인 사고와는 매우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는 법칙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이 연기의 중중무진을 다시 뫼비우스 띠처럼 시간의 전, 후를 한번 비틀어버린다. 거기에서 이 영화의 감독이 가지는 세계관과 가치관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일반상대성이론이나 특수상대성이론, 끈 이론 양자역학 중력장 이론 등 수많은 물리학의 새로운 발전과 경향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매우 난해한 수학적 해석 방법도 그러하거니와 거기에는 공리적 상상의 능력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좀체 다가가기 어려운 영역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영화로 해서 대중은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인류 역사발전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에 반드시 필요한 학문의 영역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게 한다.


우주, 광대무변의 세계, BlackHole, Worm Hole 


태초에 빛이 있었다. (성서) 빛은 초속 300,000km이다. 태양으로부터 지구까지 8분이 조금 더 걸리고 이 빛이 일 년 동안 가는 거리는 무려 9,450,000,000,000km이다. 그렇게 해서 1광년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광년이라는 말은 속도와 거리의 개념이 합쳐진 단어로서 시간의 개념이 거기에 덧씌워진다. 우리 은하로부터 가장 근접한 은하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대마젤란 은하로서 약 17만 광년의 거리에 있다. 17만 광년! 어마어마한 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영화는 Black Hole과 Worm Hole을 등장시킨다. 현재의 논리구조로는 이 영원의 거리를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Black Hole의 개념이 우선해야만 Worm Hole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웜홀이란 블랙홀에 흡입된 물질은 화이트 홀에서 방출된다. 이때 블랙홀의 흡입구가 있는 세계와 화이트 홀의 방출구가 있는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Worm Hole이라 부른다. 즉 우리 은하로부터 17만 광년이나 떨어진 새로운 은하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제공된 매우 과학적인 그러나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론인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묘사된 입체적 블랙홀과 웜홀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영화의 우주선은 웜홀과 블랙홀을 넘게 되고 그 와중에 시간과 공간이 왜곡되면서 영화 속이지만 시간의 늘어짐과 공간의 협착을 통해 주인공들의 삶이 겹쳐지거나 또는 뫼비우스 띠처럼 전후가 뒤섞이는, 정말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 위대한 물리학자 칼 새건이 “TheBlue Pale Dot”으로 불렀던 태양계 끝에서 보는 지구의 범위를 넘어 그 태양계가 포함된 은하를 넘는 엄청난 가상임에도 영화를 보는 동안은 그저 진실처럼 느꼈던 것은 아마도 나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우주의 신비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었을 것이다.


영화적 공간과 주인공들


시간의 왜곡을 다루는 영화에서 의례히 등장하는 타임머신 등은 이제는 영화적 신비감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우주공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스타트랙’류의 영화도 역시 이제 식상해졌다. 그래서 나온 영화가 사실적 근거와 이론을 바탕에 깐 ‘그래비티(2013)’라는 영화였다. 그 영화에서 진일보하여 이 영화의 공간은 현실과 우주(상상의 공간을 포함하여), 그리고 3차원을 넘어 다차원의 공간이 동시에 등장하게 된다. 관객들의 수준이 높아진 결과일 것이다.


주인공 쿠퍼(매튜 매커니히 분)의 성격은 다중 적이다. 무모함과 정교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동시에 공명심과 자만이 어우러져 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한 없이 다정한 아버지에서 어린 딸을 두고 우주로 떠나는 공명심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매튜 메커니히의 약간은 느리면서 늘어지는 대사와 음성의 톤은 이 영화의 분위기와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다. 그의 연기 덕에 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쿠퍼의 어른이 된 머피(제시카 차스테인 분)와 아멜리에 브랜든(앤 해서웨이)의 연기는 크게 극의 분위기를 조율할 만큼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딸로 등장하는 맥켄지 포이의 연기는 등장하는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상대적으로 강렬한 느낌을 준다. 


여전한 가족주의와 미국의 고민

지구의 운명을 꼭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데 미국은 그 운명을 자청하여 지구를 구할 방법을 찾아 저 험한 우주로 나아간다. 참 막중한 책임의식이다. 그런데 나는 늘 그 책임감에 의문이 든다. 왜? 무엇이 그들에게 이토록 엄청난 전 인류적 부담을 지게 했나?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자신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근거 없는 자만심이 그 부담의 원인일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자명한 공식인 가족주의는 이 영화에서 영화적 에너지를 제공함과 동시에 근간이 된다. 위에서 말한 그 부담의 원인을 영화는 가족주의라고 이야기하려는 듯 보인다. 그리고이 영화의 가족주의도 언제나 그래 왔지만 늘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 한계는 대개 얼버무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쿠퍼의 아들(케이시 애플렉)과 머피의 갈등과 화해는 매우 뜬금없이 느껴진다. 감독의 입장에서 이 정도의 논리적 부조화쯤은 넘겨주길 바라겠으나 나에게 다가오는 그 뜬금 없음은 영화적 몰입을 방해하고 남음이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