見芽
係妙停涬冥 (계묘정행명) 미묘함에 얽혀 혼돈에 머무르니,
不知而大寧*(부지이대녕) 지극한 도는 알 수 없어라.
予侗時微昧 (여동시미매) 내 어리석음으로 시절도 희미하니,
行垂否中現*(행수부중현) 변두리를 떠나지만 중심은 아님을.
2021년 3월 14일 오전. 산행 중에 새싹을 본다. 미세한 잎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돋아나는 장면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다. 한 참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으로 옮겨간다. 새싹의 신묘함에 몰입함이 오히려 혼돈에 빠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스스로의 대한 의문. 진리의 모습이 하나 일리는 없다. 다만 스스로 혼돈에 빠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일종의 경계를 두는 것이다. 1400년 전 원효는 그의 책 대승기신론 소에서 이변 비중을 말씀하셨다. 玄寂한 진리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진리의 변두리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변두리를 떠난다고 해서 중심은 분명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의 모든 일들이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듯한 기분은 나뿐일까? 하루 종일 뿌연 하늘을 본다. 내 마음처럼, 봄꽃처럼 모든 것이 희미하다.
* 『장자』 列禦寇(열어구) 3장의 마지막쯤에 있는 ‘大寧’은 지극한 도를 의미한다.
* 離邊非中(이변비중): 흔히들 ‘이변 비중’을 ‘중도’로 오해하고 있다. 이상한 시인의 혀놀림으로 그렇게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러한 평면적이 경지를 표현한 말이 아니다. 이변 비중은 空사상의 표현으로 空사상은 인간의 언어 논리에 의한 판별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원효는 인간의 몇 마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진리를 이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이것을 두고 중도니 어쩌니 하는 말은 매우 경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