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을 제어할 수 없을까?
인류의 역사가 본래부터 '발전'했던 것은 아니다 . 대부분의 시간동안 사람들에게 역사는 그저 순환하는 것으로 비쳤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시작되듯 시간은 계절처럼 되풀이됐고, 직업과 신분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늘이 내린 것처럼 정해져 있었다.
역사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계몽주의가 나타나면서부터다. 물처럼 고여 있던 시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는 둥글게 순환하던 시간을 과거에서 미래로 일직선으로 곧게 펼쳤다.
'발전'은 이전보다 지금이, 또 미래가 더 나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는 판단기준이 있어야 한다 . 모든 사람들이 함께 더 나아졌다라고 동의하자면 그 기준은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해야 한다. 계몽주의는 그것을 인간의 '이성'에서 찾았다. 모든 인간은 합리적이고 명확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이 처음으로 권좌에서 내려왔다.
백과사전과 동물원은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두개의 아이콘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전체 우주를 송두리째 해석해 낱낱이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가 전자였다면, 인간의 힘으로 재창조한 소우주가 후자였다 . 인간은 이성을 동력으로 끊임없이 발전해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우주를 재구성할 터였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상극처럼 보이지만, 실은 계몽주의가 낳은 이란성 쌍생아다. 한쪽이 역사 발전의 끝을 틔워놓았다면 다른 한 쪽은 역사의 마지막 단계로 공산주의 사회를 설정해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까 .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과, 역사의 발전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품지 않는다는 점에서, 만족을 모르는 끝도 없는'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둘은 근본적으로 닮아 있다.
1차세계대전 무렵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표한 '다다이즘'과 같은 사조들이 없지는 않았지만,'발전'의 대해에서 잔물결 이상은 되지 못했고, 역사의 발전에 대한 믿음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살아남았다 . 자본주의의 본령 미국에서부터, 공산주의를 가죽만 남긴 듯한 중국, 심지어 흡사 주체사상의 제정일치국과 같은 이북에서조차 발전의 구호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발전의 단일지배는 아무런 흠결을 남기지 않은 듯 하다. 심지어 우주조차 빅뱅이후 끊임없이 크기를 넓히며 '발전'해가고 있지 않은가.
그 우주의 뜻밖의 장소에서 우리는 예외를 만난다. 그것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숫가락과 젓가락이 발전을 멈춘 지는 이미 백년이 넘었다. 책상과 걸상도 그 본연의 구조에서 그대로다 . 반도체는 도서관을 송두리째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키보드는 전혀 작아지지 않은 채 그 모양 그대로다. 쇤베르크가 무조주의 음악, 12음기법을 창안해내며 음악을 '발전'시켰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것은 모짜르트 , 바하, 베토벤이고, 박병천의 넋풀이는 죽은 자뿐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을 훑고 지나간다.
키보드가 더 작아질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손가락이 더 작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수저가 바뀌지 않는 것은 인간의 입과 손이 더 발전하지 않기 때문이고, 책걸상이 발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 엉덩이와 다리가 더 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음악이 더 발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귀가, 우리의 영혼이 더 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발전'은 이 지점에서 발을 멈춘다.
아주 궁금하고, 또 간절히 바라는 것은, 계몽주의의 자식인 이'끊임없는 발전'을, 인간을 위해 제어할 방법, 또 다른 철학이다. 인간이 발전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갈수록 분명해져 가고 있다. '세계화'에 대한 가장 강력한 변명, 세계화에 대한 가장 단호한 명분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은, 우리가 발전을 제어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의 입, 사람의 귀, 사람의 손, 사람의 마음은 더 발전하지 않는다. 역사의 어디쯤에선가 우리가 원할 때 "이제 그만 충분하다"라고 속도를 늦추고 , 멈춰 쉴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