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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웅 Dec 31. 2019

숫자가 말을 하게 하자!

Data driven policy

‘새로운 일자리가 1,000만개 생겼고, 1,000만 명의 최저임금이 인상되었다. 1,500만 명의 노동자가 세금 감면을 받았다. 1,200만 명이 가족휴가법을 이용했고, 1,000만 명의 학생이 학생직접대출프로그램으로 돈을 절약했다.… 이 합의로 연 1회 유방암 검사와 당뇨병 검사를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또 5백만 명의 아동에게 건강보험을 확대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1960년대에 메디케이드가 통과된 이래 최대의 확대였다.…9월24일 힐러리와 나는 올드이규제큐티브오피스빌딩에서 임시 양부모가 보호하는 아동들의 정식입양을 증대시키려는 초당파적인 노력을 축하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법이 통과된 이후 입양된 아이들의 수는 2년 동안 30%나 증가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 ‘마이 라이프’는 몇 가지 점에서 놀랍다. 우선 그 두께다. 한글판으로 1,380쪽이나 된다. 2권으로 분철했지만 낱권 하나로도 휘두르면 바로 흉기가 될만하다. 또 하나는 그가 대통령이 된 뒤의 일을 다룬 2권의 앞부분부터는 정말로 단 한 페이지도 빠트림 없이 ‘숫자’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측정하지 못하면 평가할 수 없고, 평가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는 것은 경영계의 유명한 금언이다.

빌 클린턴의 자서전은 그의 성공비결중의 하나가 정확한 숫자와 그것에 근거한 정책의 입안과 실행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것을 그는 ‘산수하기’라고 불렀다. 자신과 자신의 팀의 성공의 비결은 단지 ‘산수를 제대로 한 데 있다’는 것이다.

특징을 꼽아보자. 그의 산수에는 늘 사람이 보인다. 그는 단지 경제성장률 몇 %, 조세부담률 몇 %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대신 ‘1,500만 명의 미국 노동자가 세금 감면을 받았다. 또 1,200만 명이 가족휴가법을 이용했으며, 1,000만 명의 학생이 학생직접대출프로그램으로 돈을 절약했다.’라고 셈한다.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밝힌다. 이렇게 하면 투입한 자원이 어디로 가는지, 그의 정책으로 누가 혜택을 더 많이 보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정책을 입안할 때부터 산수를 시작한다. 정책의 목표가 늘 숫자로 적혀있고, 몇 페이지를 건너가면 실제 결과가 적혀 있는 식이다. 정책의 성공과 실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소모적인 논쟁의 여지가 줄어들고, 상벌을 주기도 쉽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열심히 일한 인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마련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전에 없이 젊고 활기에 가득 찼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던 지도 모른다.

세 번째로 그의 산수에는 색깔이 뚜렷하다. 그는 자신이 노동자와 젊은 층의 기회를 넓히기 위해 일한다는 것, 교육의 질을 높이고 더 많은 소수층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려고 한다는 것, 터무니없이 낙후한 의료보험제도를 대대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일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부유층이 더 많은 혜택을 보게 될 소득세 감면보다는 재정지출의 균형 쪽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도 그는 숫자로 명시했다.

그의 산수를 빌려올 수는 없을까?

무엇보다 그의 산수의 바탕에 광범위한 통계 인프라가 깔려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리도 통계청이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미국과 우리의 이 부문 예산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일정 규모를 넘어서면 기업이든 경제든 주먹구구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 것도 없다. 지난 몇년간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은 데는 이런 모자란 통계 인프라도 한몫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동’과 ‘사실’을 구분할 수 있는 똑똑한 언론도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조세부담률’을 보자. 세금을 많이 내라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실제로는 그 자체로 너무 높거나 너무 낮은 조세부담률은 없다. 예컨대 덴마크의 조세부담률은 무려 50%가 넘는다. 우리나라는 불과 20% 수준. 하지만 덴마크의 경제성장률, 고용률은 단연 세계 최고 수준에다 행복지수도 세계 최고다. 100명중 97명이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답한다. 덴마크의 대학진학률은 불과 38%, 입시지옥도 없다. 세계 최고의 전문직업교육이 뒤를 받친 덕이다. 앞뒤없이 ‘세금 많이 내란다’고 난리를 쳐대는 언론만 우글우글해서는 곤란하다. 책임없는 포퓰리스트와 선동가만 살아남는 구조를 만들고 있는 셈이 아닌가.

철학적 논쟁도 절실하다. 숫자는 색깔을 드러낼 때 의미가 깊어진다. 흔히 세계화는 ‘미국화’로 통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덴마크, 핀란드, 네덜란드의 경제는 사회민주주의에 가깝다. 어느 길로 가야 옳은지에 대해 책임있는 말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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