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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용 Jun 20. 2021

에세이 만드는 법 _ 이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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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12

나는 이제 멋진 사람, 잊지 못할 이야기를 만나면 저절로 한 권의 에세이를 상상한다. 저 사람은 어떤 책이 될까? 어떤 목차와 제목, 표지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키를 가진 책이 될까? 에세이 만드는 법을 잘 익히면, 네가 좋아하는 모든 사람과 세상이 책이 될 수 있다던 털보 실장님의 말은 명백한 진실이었다. 


13

에세이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살아온 대로, 경험한 만큼 쓰이는 글이 에세이다. 삶이 불러 주는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숙성시켰다가 작가의 손이 자연스레 받아쓰는 글이 에세이다. 


23

나는 에세이의 타깃 독자는 결국 대중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에세이 편집자는 관련 주제나 작가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관심도 없는 미지의 독자에게 '적어도 이 책 속엔 당신이 꽤 흥미로워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방점을 찍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줄곧 믿었다. 책의 가능성과 경계를 한정 짓지 않는 것, 더 많은 독자를 상상하는 것은 에세이 편집자의 재미이자 특권이다. 


37

책 제목을 뽑아야 하는 이 결정적 순간에는 편집자가 아니라 순수하게 독자로 돌아가야 한다. 에세이 속 문장과 단어를 천천히 즐기고 필사하듯 메모하며, 각각 다른 페이지에서 발견한 단어들을 자유자재로 연결해 보는 이 본문 탐험의 여정은 제목의 영역을 확장해준다. 


43

책을 만들면서 편집자가 부득이하게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받아들이고 내려 놓아야 한다손 쳐도, 제목만은 절대 '적당히 괜찮은' 수준에 머무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목을 포기하는 것은 더 크게 확장될 수 있는 이 책의 예비 독자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편집자로서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46

띠지 문안은 편집자의 간판이다. 독자의 눈에 '띄지' 않으면 띠지가 아니라는 말은 그저 출판계에 떠도는 말장난이 아니다. 띠지 문안을 쓰는 요령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떻게든 이 책이 눈에 띄게끔, 팔리게끔 쓰는 것이다. 


66

좋은 데는 이유기 앖어도 되지만, 싫은 것, 불가능한 것, 심지어 디자인을 다시 해야만 하는 상황에는 반드시 근거와 방향, 대안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편집자가 아름다운 이미지를 꿍쳐 둔 자기만의 갤러리 그리고 원고와 작가를 근거리에서 관찰하며 모아 둔 아이템은 바로 이런 순간에 당신을 도울 것이다. 


70

스스로 작업한 결과물에 마음을 준 사람, 그 작업에서 지켜 내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만이 일에서 스트레스도 받고 화도 내는 법이다. 


82

결국 같은 제안이라 할지라도 저자에게 '이렇게 고치겠습니다' 통보하듯 남기는 것과 '이렇게 고쳐 보는 건 어떨까요? 더 좋은 표현은 없을까요?' 라고 묻는 것은 매우 다르다. 저자에게 강요하거나 편집자가 함부로 확신하지 않고, 묻고 제안하고 선택지를 제시하고 더 나은 표현을 끌어내는 교정지가 결국 더 좋은 책을 만든다. 


137

나는 아무래도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 자주 복받치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그런 사람과 동료로 일하고 싶다. 좋아하는 게 많아서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다니고 싶고 만나고 싶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 


152

우리는 일상과 생활이 이미 예술인 사람들, 예술가 이전의 예술가를 발견해 작가가 되어 보자고 유혹한다. 자신은 작가나 예술가가 될 깜냥이 아니라고, 그저 먹고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 자신이 얼마나 아름답고 대단한지 잘 모르는 사람, 그러나 곁에서 조금만 대화해 보면 내게 들여주는 이야기를 모조리 주머니에 주워 담아 간직하고픈 사람, 나는 이런 사람들을 붙들어 내 작가로 만들고 싶다. 


173

나는 꽤 자주 편집 일이 어려웠고 여기까지인가보다,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이내 어려운 일은 어떻게든 해결되었고, 내게 맡겨진 다음 책들이 미치게 재밌어 보여서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안다.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결국 나는 이번 책을 마감하고 다음 책을 또다시 시작할 것임을. 내가 만든 책이 결국 내가 살아온 시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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