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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용 Jul 08. 2021

일기시대 _ 문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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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문 앞에서 오랫동안 망설이면 망설일수록 우리는 그만큼 점점 더 낯설어지는 법이다. 만약 지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나 자신은 자기 비밀을 지키고자 하는 그런 사람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 카프카, 「귀가」에서


12

일기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선한 면을 가지고 있어서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24

내 독서의 이유는 무언가를 미루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생각을 미루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을 미루거나 불행을 미루거나, 행복을 미루거나, 책을 읽을 때는 방 한쪽으로 짐을 미는 느낌이 든다. 


25

때로는 글을 쓸 때 혼자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뭔가 필요하다. 타인. 따라 하고 싶은 타인. 나와 닮은 누군가. 혹은 나와 하나도 닮지 않은 누군가 필요하다. 


27

모방하고 싶은 대상이 있는 순간은 그렇지 않은 순간보다 덜 밋밋하니까. 누군가에게 빙의해 글씨를 연습하거나, 수학 문제를 풀거나, 남의 글을 읽고 그 사람의 문체로 글을 쓰거나. 무언가를 따라 하는 순간에는 애씀 없이 그 무언가를 하게 된다.


45

소설가들이 단체로 소풍을 갔다가 길에서 어떤 희귀한 풍경을 보았다고 한다. 그 순간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길바닥에서 가위바위보를 했다. 누가 그 풍경에 관해 쓸지 정하려고.


51

미움을 선점했다는 이유로 상대방이 나보다 위에 있는 기분이 든다. 맞서서 미워하면 되는데, 약점을 잡힌 사람처럼 빌고 싶어진다. "죄송해요. 일단 잘못했어요." 가끔 내가 내 편인지 의심스럽다. 이런 '을'스러운 세계관은 언제 생겨난 걸까?


68

갑자기 화가 났다.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옷을 입었던 사실이. 하 루 도 빠 짐 없 이. 그런데 옷은 나에게 무얼 주었나... 옷은 무조건 불편하거나 무겁다. 나는 여태껏 놈을 군말 없이 참아 줬다. 


80

소설에 대한 코멘트를 받았을 때 내가 배운 것은 '뭔가를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안 쓰고 싶은 말은 안 써도 된다'는 사실. 두 번째 소설을 쓸 때는 안 쓰고 싶은 문장은 다 지우고 쓰고 싶은 말만 썼다. 


84

진심은 마음속에 있고, 언어를 통해 끄집어내는 거라고 믿었는데 일단 너저분하게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은 다음에 거기서 진심을 찾는 게 시 같았다. 


94

어떤 것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 옆에 붙어 있으면 이해하게 돼, 저절로


102

재능은 뭔가를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언가를 남들보다 오래 좋아하는 지구력이라고 생각한다. 


147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도서관에서 사람을 사귀지 않고, 아는 사람과 도서관에 가지 않는다. 여기서만큼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오로지 혼자이고 싶다. 그런데 내 방에서 혼자인 것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인 것은 다른 외로움이다. 둘 다 혼자인 것은 맞지만, 도서관에서의 외로움은 함께하는 외로움이고, 내 방에서의 외로움은 혼자 하는 외로움이다. 전자가 있어야 후자도 견딜 수 있기에 도서관에 간다.

..

요컨대 매미는 누군가와 덜 만나려고 자신의 생애 주기를 조절하는 셈이다. 대인 기피의 조상 매미 선생님. 도서관에서 나는 매미와 비슷한 상태가 된다. 


149

내 친구 '목이 따뜻한 곰'이 말하길, 일기를 쓰고 있을 때 누가 들여다보는 건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쳐다보는 것이고, 일기를 다 쓰고 보여 주는 건 옷을 다 입고 보여 주는 거란다. 


164

조이 : 그럼 회복은 뭘까요?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거예요. 그 결과가 어떻더라도. 되돌아가더라도, 완전히 되돌아가더라도. 조금 되풀이된다고 해서 멈추는 게 아니예요. 하루씩 가는 거죠.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회복이라는 조이의 말에 울컥했다. 


213

"당신이 홀로 새벽에 눈을 뜨고 있을 때, 그리고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일 때, 어딘가에 초롱초롱 깨어 있는, 누구보다 늦게 잠드는 문 시인을 떠올려주세요. '문 시인은 지금도 안 자고 있겠지.' 하고요. 그럼 오늘도 숙면하시길 바랍니다."


217

"그건 네가 이야기를 원하기 때문이야.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틈만 나면 세상에 속고 싶어 하고, 속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 하거든."


224

사람의 가장 큰 약점은,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다시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점이야. 사람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이 사람의 가장 큰 단점이야. 하지만 미간에 정신을 집중하면 연두부가 될 수 있어. 아무것에도 기대를 걸지 않는 나 자신에게 만족하는 상태랄까. 


232

앞으로 달리는 것으로 과거 수리하기 


245

한 독자는 내가 일기 딜리버리를 보내면 '일기 딜리버리 반사'라는 것을 보낸다. 내가 보낸 일기에 자신의 일기로 답장을 보내는 것이다. 


259

나는 안심햇다. 사실 기회가 생길까 봐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차라리 기회가 없었으면 한다. 기회의 다른 말은 번거로움이기 때문에. 


267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 나는 너무 사람이다. 그래서 종종 사람이 아닌 시간이 필요하다. 가끔은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나 자신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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