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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용 Dec 15. 2021

아무튼, 비건 _ 김한민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서의 비건. 조금 더 '비건적인' 삶을 사는 것.


-


발췌


7

참으로 사람다운 삶은

그냥 존재함의 차원에 만족하는 조용한 삶이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타자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


9

무서운 타자화

타자화란 뭘까? 나와 남, 우리와 남을 가르는 행위다. 내가 동일시하고 공감하는 우리와, 내가 멀리하고 싶은 남을 구분한 후, 남을 우리의 울타리 바깥으로 밀어내는 행위다. 그 다음엔 담장을 한층 더 높이 친다. 그때부터 남의 일은 나와 무관해진다. 

..

전 세계 대부분의 사회에서 노예가 사라진 이 시대에, 동물은 사회계층에서 가장 낮은 위치를 점유한다.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최하층의 동물을 한 단계라도 승격시켜 우리의 윤리가 적용되는 테두리 안으로 포함시킨다면, 동물화는 무용지물이 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동물을 소중히 다루는 게 보편화되어 '동물처럼 다룬다'는 말이 지금처럼 폭력을 상기시키는 대신 '배려하면서 친절하게 대한다'는 뜻으로 바뀌면 우리의 윤리 체계에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12

이 나라에서 남의 위치란 참 묘하다. 한국인은 어지간히도 남 눈치를 보고 남 신경을 쓴다. 그렇다고 남을 배려하는 사회냐 하면 그건 아니다. 여기에 뜻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남이 존재한다. 전자의 남은 필요 이상으로 눈치도 보고 신경도 쓰고 과도하리만치 배려하는 존재다. 후자의 남은 마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며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다. 전자의 남은 '우리'속에 포함되는 남으로, "우리가 남이가"라고 말할 때의 우리, 즉 가족, 친구, 회사 사람 등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관계의 사슬 안에 포함되는 남이다. 후자의 남은 테두리 밖에 남겨진 남이다. 길거리의 행인, (주로 저개발국가 출신) 외국인 등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무리다. 전자의 남에게 오버해서 친절한 만큼, 후자의 남은 무례하게 하대한다. 어느 인류학자는 서양인은 목적 지향적이고 동양인은 관계 지향적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현대 한국인은 '이해관계 지향적'이라고.

..

현평이 이러니 동물 '따위'야 남 중에서도 가장 뒷전으로 밀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타자나 소수자 문제에 관해 제법 진보적인 견해를 가졌다는 이들도 동물 문제에는 무심하다. 동물은 심지어 남으로 치지도 않는다. 물건이나 고기일 뿐이다. 가장 타자화된 타자, 남 중의 남. 그래서인지 나는 수많은 타자 가운데서도 동물에 가장 마음이 간다. 


15

우리에게 동물은 물과 공기 같은 존재인 것이다. 없이 살 순 없지만, 너무 당연해서 생각도 안 해보게 되는. 그런데 물, 공기와는 달리 동물에겐 의식이 있다. 감정도 있다. 그래서 우린 물과 공기를 괴롭힐 순 없지만, 동물에겐 고통을 줄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줄 수 있다. 


16

비건의 핵심은 거부가 아니라 연결에 있다. 비건이 되는 것은 산업과, 국가와, 영혼 없는 전문가들이 단절시킨 풍부한 관계성을, 어린아이였을 때 누구나 갖고 있던 직관적 연결고리를, 시민들이 스스로의 깨우침과 힘으로 회복하는 하나의 사회운동이다. 


45

우리는 행동으로 증명할 것이다. 비건은 평범한 개인이 지구와 동물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도울 수 있는 운동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51

자신을 규정짓는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만, 규정을 모두 벗어던지는 방식이야말로 가장 쉬운 길이다. 좋게 보면 자유롭고 유연해 보일지 몰라도, 흔해빠진 무원칙의 편의주의이기도 하다. 나는 나름의 절도가 있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최소한으로 지키고자 하는 선이 있어야 때때로 나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쩌면 모든 윤리는 최소한의 윤리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는 하지 않겠어'라라는 자세이다. 그 최소한이 점점 커지는 방향으로 살고 싶다. 


53

한 비건 활동가이자 연구가는 주장한다. 완벽한 비건을 몇 명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다수의 사람들을 더 '비건적'으로 만드는 것이 사회 전체로 봤을 때 훨씬 효과적이라고. 동물을 살리는 데도, 환경을 보호하는 데도, 공중 건강을 위해서도 말이다. 일단 비건-친화적인 사회가 되기만 하면, 실천하기가 점점 쉬워지면서 비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건은 내게 정체성이나 명사이기 이전에 형용사이다. '비건적'인 작은 노력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비건은 소수자 운동을 넘어서서 정말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57

비건만큼 '커밍아웃'을 했을 때 실제 상황에 파급력이 큰 경우도 드물다. 최소한 하루에 세 번, 매끼마다 스스로 선택의 순간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직접 해보면 주위의 관심 혹은 '감시'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늘어남을 체감할 것이다. 커밍아웃을 한 성소수자들도 매끼마다 성 정체성이 화제에 오르내리진 않는다. 최소한 성적 지향은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암묵적인 합의라도 있는데, 음식은 누구든지 한마디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인식되어 있으며, 단체 식문화가 발달한 한국은 그 폐해가 더 심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비건을 하면 도 닦는 심정이 된다.


64

철학자 레비나스는 얼굴의 윤리학을 말한다. 그는 "얼굴은 하나의 명령"이라고 했다. 얼굴은 그 자체로, 언어를 초월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나를 사랑하라, 나를 죽이지 마라, 형제여, 자매여.." 모든 얼굴은 그렇게 말을 한다. 


68

인간끼리 소유하는 제도가 노예제였다. 이 부적절한 소유 관계는 철폐되었다. 이제 그 어떤 근로자도 사용자의 소유가 아니라 상호 계약 관계에 있을 뿐이다. 왜 동물은 여전히 사유재산이 될 수 있을까. 동물은 아직도 노예, 또는 노예보다도 못한 물건이다. 농장의 소는 식품, 펫숍의 강아지는 반려상품, 보신탕의 개는 보양상품, 아쿠아리움의 돌고래는 관광상품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농장의 돼지는 식품노예이고, 관광지의 당나귀는 운반노예, 펫숍의 고슴도치는 반려노예이다. 

생명을 가진 데다가 고통을 지각하는 동물을 우리가 이처럼 노예화하거나 상품화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옛날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인간이 힘이 더 세기 때문에? 더 영리하기 때문에? 논리가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세니까 여자를 이용할 권리가 성립한다고? 일반인이 정신지체장애인보다 똑똑하니까 그들을 이용할 권리가 생긴다고? 멀쩡한 정신으로 이런 주장을 할 사람은 없다. 


71

한 사회가 동물을 다루는 방식, 이들을 통해 식품을 생산하는 방식이 윤리와 공중보건과 지구 전체에 영향을 준다면, 이는 당연히 공적인 비판과 감시, 규제의 대상이 된다. 개별 사안만 보면 개인의 선택이라고 해도, 이것이 모여 전체적으로 끼치는 결과가 공공 영역의 안녕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탁은 공적이고 정치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97

변화가 일어나는 때는 언제인가. 누군가 안 하던 걸 할 때이다. 나도 SNS는 물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싫다. 나도 가족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는 게 좋을 리 없다. 나도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동물과 숲과 사람들의 고통을 떠올리면, 생명 하나라도 구할 수 있다면, 안 하던 짓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103

상대방을 죽이고 먹는 행위에 과연 사랑의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게대가 죽이거나 먹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고, 그저 맛과 편의를 위해서라면?


104

또 다른 문제는 편애다. 어떤 동물은 극진히 사랑하지만 어떤 동물은 죽여도 그만인 태도인데, 이를 '종차별주의'라고 부른다. 인간 본위의 자의적인 분류 체계로 동물의 용도를 지정하는 것이다. 개는 반려동물, 돼지는 식용, 붕어는 관상용.. 한국은 심지어 같은 개도 애완용과 식용으로 나누니 어디서부터 얘길 해야 할지 난감하다. 비슷한 예로, 자신의 어머니와 누이, 배우자, 애인, 딸은 극진히 존중하고 아끼면서 '업소 여성'은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일부 남성들의 사고방식이 있다. 이는 오로지 분류자의 편의에 의한 분류일 분, 대상의 본질은 변함없다. 


109

동물들도 동물을 먹잖아?

인간의 윤리를 동물의 행동 생태에 기초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은 오히려 자연의 원리로 흔히 통용되는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벗어난 '문명인'으로서 높은 수준의 윤리, 상호배려와 인간성을 이뤘음을 자랑으로 삼아왔다. 동물 착취를 정당화할 때는 인간의 우월함과 특별함을 들먹이다가, 야만적이고 비윤리적으로 행동하고 싶을 때는 "우리 역시 어쩔 수 없는 동물일 뿐"이라며 책임을 내팽개치는 것은 편의주의적이고 비겁하며 앞뒤가 안 맞는 태도이다. 


110

인간의 몸은 육식동물보다 초식동물에 더 가깝다. 치아 가운데 90퍼센트가 어금니처럼 식물성 음식을 먹기 위한 맷돌형 치아다. 가장 날카롭다는 송곳니조차 뭉특해서 육식동물처럼 다른 동물들의 가죽과 근육조직을 물어뜯어내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며, 오히려 딱딱한 과일이나 견과류, 질긴 섬유질을 씹는 데 적합하다. 구강 구조도 악어나 고양이류처럼 아래위로 씹도록 되어 있지 않고, 초식동물처럼 식물이나 곡식을 으깨고 갈아먹기 좋도록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인다. 


145

비거니즘의 목표는 고통의 최소화에 있다. 


147

먼 훗날, 만약 식물의 고통을 증명할 수 있고, 식물을 먹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을 날이 온다면, 아마 가장 먼저 열린 마음으로 이 변화를 수용할 사람들도 비건이 아닐까 한다. 육식주의자들은 그때도 구실만 찾을 것이다. 


152

비건의 목적은 백 퍼센트를 이루는 데 있지 않다. 지구와 동물들에게 끼치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더 건강하고 윤리적인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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