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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어른이 되면

생각많은 둘째언니, 장혜영

by 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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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다. 신체적, 정신적 다름은 '격리'라는 폭력적 차별을 만든다. 장애인을 시설에 격리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학창시절부터 일종의 '격리'를 경험한다. 성적에 따라 우등반, 열등반이 나뉘는 것이 흔했고, 내가 다니던 학교는 특수반이란 이름으로 장애아, 문제아를 한 반에 몰아넣기도 했다.


책의 저자는 18년간 시설에 '격리'되었던 발달장애인 동생을 시설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 자신의 힘으로 동생을 충분히 돌볼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자신이 사회적 지원과 여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듯이 동생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낮았고, 장애 당사자를 위한 복지는 부족했다.


이 책은 6개월간의 탈시설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 '어른이 되면'을 글로 옮긴 것이다.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동생이 하면 안 된다고 규정한 것들을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미루었고, 동생은 자신이 지금 할 수 없는 일들을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녀의 나이 이제 서른이다. 다큐는 이미 어른이 된 동생의 평범한 일상을 담는다. 그런 평범함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한다.


이런 이야기가 더 많아져야 한다. 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이야기나 장애와 가난으로 한없이 불쌍한 이야기가 아닌 이렇게 평범하게 우리 곁을 살아갈 장애인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발췌


35

이곳은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보호하는 곳이기 때문에 '거처' 이상의 인간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전한 일, 더 나아가 지금의 '균형'을 깨뜨리는 위험한 일이었다. 나는 미처 몰랐다. 이곳에서 혜정이에게 주어진 것은 인간다울 권리가 아니라 그저 '고마운 줄 알아야 하는' 호의였다.


58

동생은 18년간을 시설에 살았습니다. 동생은 어느새 서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아이처럼 '어른이 되면' 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들은 동생이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61

지금껏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 특히 발달장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없었습니다. 헬렌 켈러처럼 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이야기 아니면 불행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불쌍한' 이야기가 우리 사회의 장애인 서사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장애인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사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장애인은 위대해야 할 필요도, 불쌍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뿐입니다. 지금 장애인이 우리 옆에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격리했기 때문입니다.


91

혜정이의 자립에 대해 고민할 때 나에게 명확한 해답이 되어준 것도 바로 삶이란 곧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확신이었다. 만일 내가 살면서 부딪쳤던 모든 문제들을 오롯이 내가 가진 능력과 자원만으로 해결해야 했다면 내 삶의 모습은 지금과는 무척 달랐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어떤 관계망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95

헤정이와 지내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에만 찾아오는 어떤 신선한 공기가 있다. 나는 그것이 나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새로운 세상의 공기라고 생각한다. 연약한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언젠가 내가 연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116

많은 사람들은 질병과 장애를 혼동한다. 질병이 '낫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라면 장애는 '가지고 사는 것'이다. 질병은 치료의 대상이지만 장애는 적응의 대상이다. 장애는 손상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를 가진 개인의 삶과 그 삶이 놓인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구체적인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장애인이라는 말과 세부적인 장애의 명칭들, 장애인을 일컫는 다양한 속칭들에 비하적인 의도를 담아 사용한다.


잘못된 것은 장애가 아니라 누군가의 바꿀 수 없는 존재나 정체성 자체를 멸칭으로 사용하는 행동이다.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람들은 장애를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는 바로 그들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자폐성장애와 지적장애를 묶어서 이르는 '발달장애'라는 단어는 이미 장애의 특성 자체를 긍정적으로 호명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인간의 발달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므로 발달장애인은 멈춰선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이다.


150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를 시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출발 선상에서 인생을 시작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 사회에는 분명히 태어나자마자 상대적으로 '더 살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을 더 괴롭게 하는 원인은 그들 자신에게 있지 않다. 삶의 다양한 존재 양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떤 특정한 삶의 양식만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이 사회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164

장애인을 대할 때 필요한 것은 배려와 호의, 친절한 태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많은 사람들은 비장애인을 대할 때는 당연하게 지키는 매너를 장애인 앞에 서면 지키지 않는다.


지금의 복지 시스템은 이러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은 채 장애인을 대하고 있다. 국가에게 장애인은 인간이 아니라 '몸'이다. 국가는 마치 자동차 수리비를 지원하듯 개별 장애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국가가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심사하여 배정할 수 있다고 여긴다. 장애인 복지를 삶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로 편협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176

장애인을 대하는 많은 비장애인들은 그 앞에서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느낀다. 하지만 비장애인 간에도 처음 만나 관계를 시작할 때에는 늘 실수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유지하며 진실한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관계에서도,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185

아카사키 마사카즈 감독 인터뷰

"함께 있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과 함께 놀 기회조차 없다면 서로를 알 수 있는 계기도 없습니다.


발당장애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도 함께 지내려 한다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 저는 더 즐겁다고 생각합니다."


214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답이라기보다는 질문이고 방법이라기보다는 원칙이다. 내 말에 힘이 실리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믿고 있는 것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나의 실천이 그대로 타인의 실천이 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 각자에게는 자기 삶의 거리에서 저마다 실천을 찾아야 하는 숙명이 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답을 찾는 지난한 과정을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응원하며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232

탈시설은 시설로 보내졌던 장애인이 다시 가정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시민으로서 사회로 돌아오는 것이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장애 정도가 심하며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도 사회에 어울려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고민해야 한다. 언제까지 우리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운명을 그들이 어떤 가족을 만나는가에 맡겨두어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이미 가족의 해체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235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하는 일이어야 할까. 모든 것을 떠나서 이러한 고통을 부모로서, 한 개인으로서 마주해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타인으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과거 우리 부모님의 모습을 통해 그저 그 무게감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뿐이다. 여기에서 감히 잘한다느니 못한다느니 하는 말을 할 자격은 내게 없다.

보내는 것도 보내지 않는 것도 고통이다. 어떤 뾰족한 공적인 도움 없이 혼자서 중증 장애가 있는 딸을 돌보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자기가 편해지기 위해 딸을 시설로 보내는 것 또한 너무나 죄스럽고 마음 찢어지는 일이다. 어느 쪽을 골라도 괴로움에 빠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잘한 선택'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런 것을 선택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 부당하고 잘못되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린다 하더라도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 결정이 가져오는 고통의 무게를 오롯이 지는 것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266

우리는 아주 어렸을때부터 능력으로 사람들을 서열화하고 분리하고 서로 다른 처우를 하는 경험을 수없이 해왔어요. 우열반, 장애, 피부색 등등 수많은 다르다는 이유들, 상대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로 서로를 배제하고 분리하고 격리하고 내가 격리당하고 혹은 남이 격리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라오면서 어느 순간 그게 당연한 거라고 믿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들,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한 사람들이 오히려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회 밖으로 격리당하는 것을 봤을 때도 뭐 그런 삶도 있는 거지. 라며 고개를 끄덕여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격리로 가득한 사회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고통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고통을 숨기는 데 급급하기 때문에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곪아 터지기 마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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