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권외편집자

츠즈키 쿄이치

by 라용
P4170011.jpg


손이 빠른 디자이너라고 나를 소개하다 아차 한 적이 있다. 나 말고 다른 디자이너가 스스로 손이 빠르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순간, 그 순간 모든 디자이너가 그렇게 말하겠구나 싶었다. 나 손 느려요 하는 디자이너는 없을 테니까. 이렇게 나만의 장점으로 소개하고 싶은 것이 그냥 평범한 사실인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책의 저자 츠즈키 쿄이치와 나의 공감대라고 생각한 것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바로 마이너한 감성인데 마이너하다는 표현이 적절한진 모르겠다. 대략 설명하면 남들이 다 하는 뻔한 것 말고 남들이 하지 않는 무엇을 쫓는 취향, 돈이나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메이저 영역보다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대부분 돈이 안 되는)으로 가는 감성?을 말한다. 다들 이런 마이너함이 있지만,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그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다. 그래서인지 돈은 덜 벌면서 몸은 더 힘들어진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가슴이 뛴다고.. 자신이 원하는 취재를 하기 위해 회사에 속하지 않고 '권외편집자'로 살아가는 저자를 보며 나도 비슷하게 살지 않을까 생각했다. 재미있는 장소를 발견하는 비결을 묻는 이에게 "비결은 계속 달리는 것밖에 없다. 비결 같은 것이 있다면 내가 배우고 싶다"고 하는 고리타분함도 참 매력적이다. 대중, 유행, 전략..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그런 비결들 다 치우고 그냥 계속 달리고 싶다. 그냥 내가 끌리는 대로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며 살고 싶다. 다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겠지?




발췌


7

편집자를 시작했던 40년 전의 상황과 똑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달라진 점도 있다. 그때보다 체력은 떨어지고 수입은 줄어드는데 고생은 더 늘었다. 그래도 좋다. 매월 입금되는 돈보다도 매일 느껴지는 두근거림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편집자로 사는 사소한 행복은 출신 학교나 경력, 직함, 연령, 수입과는 상관없이 호기심과 체력과 인간성만 있으면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에 있다. 이런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10

계획이 순조롭게 세워졌다면 누군가가 먼저 찾아낸 정보가 있다는 뜻이다. 그 시점에서 기획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나에게 검색 결과가 많다는 말은 패배나 마찬가지다.


13

지금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취재해온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정말 엄청난 책을 만드는 사람은 평범하고 과묵하며 혼자서 꾸준히 하는 작업을 좋아하는 이들뿐이었다. 말로 설명하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어서 모두에게 보여주는 행위가 그들에게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인 것이다.


18

회의는 위험을 회피하려는 '리스크 헤지'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모두 함께 결정했으니 만약 실패한다 해도 "다들 괜찮다고 했잖아"라며 둘러댈 핑곗거리를 만들어두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어떤 의미에서 집단책임회피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책임을 미루는 사이에 취재할 소재의 신선도는 점점 떨어져간다.


22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이 직접 문을 두드리고 열어봐야 경험이 쌓인다. 그렇게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머지않아 주변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게 되고, '좋다'고 느낀 자신의 감각을 확신할 수 있는 날이 온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게 자신을 다져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27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고려하지 말고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를 추구하라는 가르침을 통해 나는 진정한 편집자로서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31

결국 편집을 잘하는 방법에 대한 힌트가 있다고 한다면, 좋아하는 책을 찾아 찬찬히 읽고 소화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2

편집자를 하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을 필요는 없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100번 읽은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53

당초의 계획은 틀어졌어도 아무것도 아닌 장소에서 잡지를 만들어가는 일이 사실은 무척 좋다... 전혀 예기치 못한 만남은 예상을 뛰어넘는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85

나는 대중매체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반적이지 않은 환상이 아닌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가능성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어디든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길거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96

나에게 "재미있는 장소를 발견하는 비결이 뭔가요?"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비결은 계속 달리는 것밖에 없다. 비결 같은 것이 있다면 내가 배우고 싶다.


137

감성은 옛날 사람에 비해 결코 둔해지지 않았다. 둔해지기는커녕 인터넷이나 휴대전화의 발달로 모든 사람이 이렇게 글을 열심히 쓰는 시대는 이제까지 없었다.


141

사진이 있으면 쓰는 이에게도 읽는 이에게도 사건이 무척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니 가는 건 무의미하다'라는 생각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가보자'라는 생각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176

모든 일을 따져보고 등급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호불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말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이런 일을 해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192

인터뷰에 노하우란 없다. 대화는 각자가 만들어온 호기심과 경험치가 만나는 지점에서 불꽃이 일어나고 불이 붙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다양한 일에 흥미를 가지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방법 외에 지름길은 없다.


237

이 시대를 정의하는 말이 있다면 '유행이 없는 시대'가 아닐까.

오늘날 우리들은 대중매체를 통해서만 시대의 흐름을 접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중매체가 가진 특권으로 정보를 수집해서 유행을 만드는 시대는 훨씬 전에 끝나버렸지만, 이러한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일들은 정작 대중매체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는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른이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