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요즘은 일하는 곳 근처에 작은 서점이 있어 거의 매일 둘러보곤 한다. 신간이 뭐가 나왔나 살펴보기도 하고, 매장 내 평상에 앉아 안 살 책들을 읽기도 하고, 할 일 없이 책 제목과 표지 디자인을 구경하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나의 평소의 시간에 발견한 책이다. 보통 한 달에 1, 2권 정도 우연히 발견한 책을 사게 되는데, 이 책은 'TBWA'라는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카피라이터'가 썼다는 이유로 큰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나는 카피라이터가 쓴 긴 글이 좋다. 리듬을 살린 짧은 카피를 많이 써봐서일까. 긴 글에도 그런 흐름이 있는지 책이 잘 읽힌다.)
책은 그가 평소에 발견한 여러 가지 것들을 나열한다. 어떤 찰나의 순간이나 기억하는 장면이기도 하고, 짧은 문장이나 즐겨듣던 음악이기도 하다. 그는 그런 평소의 발견들에 힘을 얻고 꽤 행복하게 일하고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나서 나도 나의 평소를 더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책을 통해선 아래 두 음악을 발견했다.
발췌
5
인간은 치약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시간을 우리는 치약으로 살고 있습니다. 짜내고, 짜내다가, 텅 빈 껍데기로 버려지는 삶.
.. 출구는 있지만, 입구는 애초에 설계되어 있지 않으니까. 누구도 짜낸 만큼의 치약을 튜브 안으로 집어넣어주지 않으니까.
필요 이상으로 오랜 시간을, 능력 이상으로 많은 일들을 쳐내기 위해 책상에 앉아 있는 세상의 치약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뭘까요? 저는 그것이, '평소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18
그렇게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쉽게 설레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미리 두근댔다가 실망했던, 그 당혹스러운 낙차를 경험하기 싫어서겠죠.
24
화려한 덩크슛이 필요 없구나. 그냥 안정적으로 레이업슛을 하면 되는 거구나. 림 위에 농구공을 부드럽게 던져놓고 오는 레이업슛처럼, 멋 부리지 않고 편안하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우리가 준비한 이야기를 얹어놓고 오면 되는 거구나.
34
"가장 감동적인 글은 필자가 말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 때 나온다."_레프 톨스토이
36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100퍼센트의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늘 어떤 가면을 쓰고 있죠. 예의를 차려야 하고, 멋져 보이고 싶고, 약점은 숨겨야 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감정의 민낯을 드러낼 일도 드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감정의 민낯을 볼 수 없어 오해를 하고, 필요 없는 감정 소모를 합니다.
54
나에게 없는 것이, 내게 부족한 것이, 어쩌면 내게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간절함이 되고, 앞으로 나아갈 동력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때론, 결핍이 명백한 존재가 더 사랑스럽다는 생각도 합니다.
79
나를 대하는 상대방의 태도는, 메일에서 발견되는 오타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기업의 홈페이지에 올라간 잘못된 약도는, 그 회사가 고객을 대하는 태도를 말해줍니다. 선물의 포장지는 내용물을 더 좋게 바꾸진 못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소한 것에 더 신경을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소함 속에 진실이 숨어 있으니까요. 우리가 미처 감동할 준비를 하지 못한 순간 찾아오는 조그만 배려가, 때론 가장 깊은 감동으로 남으니까요.
100
시간을 이기는 관계는 없습니다. '만날 사람은 만나겠지.' 그런 것 없습니다... 제가 믿고 있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인연이 아니라 의지이다.'
103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 이것은 부끄럽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를 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108
사랑의 시작은 어쩌면 사소한 디테일에서부터가 아닐까? 우리는 무언가의 디테일 하나에 마음을 뺏기고는, 그것을 사랑할 100가지 이유를 찾고 있는 건 아닐까?
126
하고 싶고 잘하고 싶을 때 비로소 양질의 생각이 나옵니다.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면 딱 해야 하는 수준만큼의 생각만 나옵니다. 적당히 아이디어를 내고 적당한 지점에서 생각의 문을 닫으니까요.
132
부정은 생각을 한 발짝도 나아가게 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나의 생각만이 옳은 회의실에서는, 회의실에 들어올 때와 나올 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란 거의 보지 못했어요.
142
내 곂에 작은 숲을 놓는 건 좋다
불어오는 바람도 좋지만
내가 만든 바람은 더 좋고
허브를 키울 자신은 없지만
민트티는 좋다.
큰길보단, 골목
낮의 강남보단, 밤의 한강
'화려한'이란 형용사보단
'자연스럽게'라는 부사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00의 이야기
당신의 일상에,
자연이 스며들도록
당신의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빛을 내도록
담그고, 우려내고
기다리고, 기다립니다.
자연이 스스로
가장 좋은 것을 내놓을 때까지
00
189
음악 밖에서 음악을 찾는 것. 책이나 영화 같은 미디어에서 음악을 줍는 것은 늘 흥미로웠고, 예상 밖의 수확을 했습니다.
208
'손수건만큼만 울고'라는 표현은 꽤 충격적이었어요. '울다'라는 표현을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214
때론 문장이 좋은 내비게인션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음에 담아둔 몇 개의 좋은 문장들이
살면서 방향을 잃었을 때 덜 헤매게 하고
더 빨리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었던 경험.
다들 있으실 거예요.
'그래, 그런 말이 있었지' 떠올리고 나서는
혼란스럽던 머리가 선명해지던 문장.
저를 달뜨게 만든 문장.
필요할 땐 차가운 합리주의자로 만들어준 문장.
219
생각해보면, 가장 힘든 건 늘 '시작'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시작만 하면, 씨앗을 뿌려놓으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은 시작되고 몇 년 뒤엔 분명 수확의 시간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수확의 질과 상관없이, 나는 분명 조금 달라진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220
어제 술을 먹어서. 오늘은 일이 많으니까 체력 안배를 위해서. 어제 잠을 깊이 못 잤으니까 아침에라도 부족한 수면 시간을 채우기 위해. 왠지 미세먼지가 있을 것 같아서. 아직 추운 것 같아서. 아직 더운 것 같아서. 일어날 이유보다 훨씬 많은 그냥 자야 할 이유들. 그러니 아침 운동의 가장 먼 구간은 알람을 끄고 일어나, 현관에서 신발 끈을 묶는 곳까지의 거리입니다. 일단 현관문을 나서면? 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네요.
227
당신은 회사원이지만
등산가이고
야구팬이면서
아빠이기도 하니까
그 모든 당신을 위한
세상의 모든 신발
ABC 마트
당신은 신입사원이지만
모험가이고
러너이면서
여자 친구니까
그 모든 당신을 위한
세상의 모든 신발
ABC 마트
236
모든 것을 할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_클럽 메드
248
'천재성'과 '낭만'의 영역이라고 느껴지던 글쓰기가, 실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매일의 꾸준함에 빚지고 있다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259
시간의 힘을 통해 얻은 것이 존중받는 사회는 늘 부럽습니다. 반대로, 오직 젊고 새로운 것만이 주목받는 사회의 면면을 발견하는 날은 서글픕니다.
261
몰두하는 이의 뒷모습은 멋집니다. 몰두의 시간은 분명 선물을 안겨줄 거예요. 그 몰두의 시작이, 남의 강요가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의 결과라면, 당신이 보낸 몰입의 시간은 급하게 집어넣은 지식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당신을 닿게 할 겁니다. 시간의 힘으로 얻은 것들이 더, 더, 더, 존중받는 사회를 만나길 희망합니다. 기왕이면 그 사회가, 내가 사는 이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평소의 발견 _ 유병욱|작성자 라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