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오리 이름 정하기

이랑 이야기책

by 라용

인터넷 기사를 통해 가수 '이랑'을 처음 알았다. 어떤 음악 행사에서 상을 탄 인디 뮤지션이 그 트로피를 즉석에서 경매했다는 내용이었다. 창작자의 어려운 생활고를 풍자한 퍼포먼스라고 했다. 전에 보지 못한 신선한 퍼포먼스였으나, 메시지는 그저 그랬을까. 그 이후가 궁금하진 않았고, '이랑'의 노래나 활동을 따로 검색해보지도 않았다.


최근 참여한 프로젝트에서 '이랑'의 사진과 한마디를 담아 이미지를 만들 기회가 있었다. 한마디를 요청하고 받는 과정에서 동료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니, 그 팬심의 근원이 궁금했다. '이랑'이 그렇게 좋나? 하는 마음으로 그의 노래를 쭉 들어보고, 뮤직비디오도 찾아봤다. 결과적으론 나도 그의 팬이 되었다.

이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 뮤직비디오가 나에겐 충격이었다.

그 가수 '이랑'이 책을 냈다. 아니 이 사람 책도 써? 싶었는데 찾아보니 그전에도 책을 낸 적이 있었다. 안 살 이유가 없는 책이 나왔는데, 표지도 너무 이쁘고 막.. 아무튼 책은 뭔가 묘하고 좋았다. 나의 팬심은 더 커졌다.



발췌


21

좀비 영화 보면, 주인공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잖아. 나는 그런 게 이해가 안 됐거든? 만약에 온 세상 인구의 99퍼센트가 좀비가 되어버렸다면, 빨리 좀비가 돼서 편하게 아무 걱정 없이 으어어 하면서 돌아다니는 게 낫지 않아? 계속 사람으로 있으려고 하니까 힘든 거 아니야?


92

형은 앞으로 가세요. 저는 거꾸로 가도 괜찮다고요. 보출이 얼마나 중요한지 형도 아시잖아요. 영화에 주인공만 나오면 그게 어디 진짜 같나요? 뒤에서 작은 역할들이 움직여줘야 진짜가 되죠. 저는 그게 진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166

요즘엔 '섹스=사랑' 공식에서 '섹스' 칸을 대체할 뭔가를 찾고 있어요. 사람들은 원래 이유도 잘 모르면서 새로운 것을 원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서 사랑의 표현을 주고받기 위해 뭘 하면 좋을까요? 몸에 뭔가를 삽입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고 싶어요. 귓구멍이나 콧구멍.. 또 어디가 있을까요. 이것도 이상하긴 하네요. 왜 이렇게 구멍을 찾는 건지..


177

엄마는 내가 대학에 가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내가 대학에 가는 게 싫었던 걸까? 내가 뭔가가 되는 게 싫었던 걸까? 내가 뭔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을까?


178

용기를 내서 어둡고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냈던 친구들은 끝까지 힘 있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다시 그 과제를 할 수 있다면, 나도 엄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 하지만 사랑해야만 할 것 같은 사람. 그게 거짓일지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척해야 만 할 것 같은 사람.


181

"너도 그냥 말해. 왜 영화를 하는지, 그렇게 아무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작품을 만드는 이유가 뭔지, 나처럼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아직 못 했는지, 아니면 그렇게 밖에 못 하는 건지 한번 말해보라고."

"말하기 싫은데"

"뭐야, 유치하게"

"나는 말하기 싫어서 영화를 만드는 건데. 너처럼 뭔가를 말하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이랑 말 섞기 싫어서 영화를 만드는 거라고."


187

나는 오랫동안 신과의 대화를 꿈꿨다. 신을 만나면 물어볼 말을 생각해두기도 했다.

왜 이 불행한 세상을 만들었습니까?

나는 왜 살아 있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언제까지 계속됩니까?


198

"그래, 버리면 살아. 그리고 마음 수행하다 보면 네가 지금 너라고 믿는 거, 그게 네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돼. 그런 재미가 있어. 자꾸 떠오르는 실타래를 딱 끊고 보면, 마음을 의식으로 확장하다 보면 다른 것들이 자꾸 보여. 선생님 말이 가짜 같아?"


212

'센스가 있어야 해.'

센스가 좌우할 일이었다. 그것이 종교인지, 사이비인지, 무속인지, 아니면 예술인지 말이다. 지하철에서 외치던 여자의 말은 진리일 수도 있었지만, 그 모습으로는 소용없었다. 하지만 조금 더 센스 있고 멋진 모습으로 같은 말을 한다면, 사람들이 감탄하며 손뼉을 칠 수도 있었다.


221

"그렇지. 나에게는 어떤 순간만이 특별하지 않아. 다만 내가 매 순간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집중할 뿐이지. 그 집중이 깨지는 순간이 오히려 힘들다고 할까? 차라리 특별하다면 그 순간이 특별하달까?"


222

"적어도 나는 그래. 내 삶의 목표랄까? 일단 목표라고 할게. 그게 내가 나를 제대로 인지하는 거거든. 내 몸의 움직임, 정신의 움직임.. 그리고 그것들이 또렷하길 바라고. 착각에 빠져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264

저는 이랑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지만 종종 제 인생의 어느 부분을 기록하고 남기는 일을 하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기도 합니다. 일을 하면서 제가 하는 말과 행동에 의미가 있다고 확신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대를 보러 와주시는, 작품을 사주시는 분들이 있을 때마다 '왜 그럴까?' 의심하고 혹 그분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행동을 할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제 노래와 이야기를 좋아하고 응원한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제 부족함과 미숙함에 실망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자주 상상합니다. 저는 왜 이렇게 겁에 질려서 일을 할까요.


.. 겁에 질리지 않고 일하고 싶습니다. 엄마는 제게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 말은 엄마 김경형이 얼마나 겁에 질려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자란 딸 이랑도 얼마나 겁에 질려 살고 있는지 말해주는 것 같아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안타깝고 슬펐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리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면 엄마에게는 수십 권의 '김경형 이야기책'이 남아 있었을 것이고 제 첫 번째 '이랑 이야기책'의 완성을 매우 칭찬해주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서 제가 엄마에게 또 하나의 걱정을,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 같아 이 책의 완성이 조금 슬프기도 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디자인FM _ 시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