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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_ 박연준

by 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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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집. 이상하게 흐르는 인생을 잘 포착하고 잘 써냈다. 쓴다는 건 이상함을 발견하는 일 같기도 하다. 더 많이 생각하고 가끔 불편해지는 일이니까. 책에서 쓰는 사람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지 않는다. 망설이고 자주 기다린다'고 했다. '그 손에서 세상은 느려질 것'이라고도 했다. 망설이고 기다리면서 종종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거 좀 이상한데?' 하며 브레이크를 거는 사람. 인생은 이상해도 흐르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며 잠깐 느려졌다.


발췌


21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라고, 이문재 시인이 썼던가.


29

지나치게 애를 쓰는 일은 사람을 상하게 한다. 찰스 부코스키가 한 명언이 있다. "노력하지 마." 안심이 되는 말 아닌가? 나는 그의 말을 안달복달하지 말고 순리에 맞게 살라, 지나치게 애쓰다 상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사람이 상한다는 건 독해지고 비루해진다는 거다.


30

헬싱키에서 나는 '멋'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멋이란 자연스럽고 견고하고 건강한 것이다. 자신이 자신임을 좋아하는 것, 자기다움으로 충만한 것! 타자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때, 멋 내지 않을 때 멋이 난다. 그곳에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내 안에도 '자연스러운 당당함'이 있음을 느꼈다.


33

그때 우리는 대체로 무구하고 무력했다. 원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원할 줄 몰랐고,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용할 줄 몰랐다. 우리는 동물원의 동물들 같았다.


34

동물원에서 우리는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잠자코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코끼리나 사자나 기린이나 뱀이나 그저 잠자코 존재하면 되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서로에 대해 열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멀찍이서 관망했다. 특히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저쪽으로 보세요, 저쪽에 나보다 더 슬픈 생물이 웅크리거나 서거나 누워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이쪽에 잠시 숨어 있을게요. 이런 생각을 하며, 동물원에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38

그저 어떤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어서 쓴다고 생각합니다. 다르게 표현하고 다르게 소리 내고 싶은 욕망은 다르게 보고, 다르게 살게 합니다. 그것은 낯익은 세상에서 평범한 것들의 '새 얼굴'을 발명하는 일입니다.


40

문학은 '삶의 라이벌'로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향해 다시 질문합니다. 그 과정에서 문학은 언제나 삶의 속도를 늦추는 브레이크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브레이크는 당신의 연필, 우리들의 연필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깊은 밤, 잠 못 들고 연필을 쥐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세상은 느려질 것입니다.


쓰는 사람은 결코 목표를 향해 돌진하듯 써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쓰고 싶은 대상 앞에서 망설이고, 자주 기다립니다. 매일 겪어온 아침을 처음 겪는 아침인 듯 다시 생각합니다. 당연한 것을 질문합니다. 많은 것이 적은 것이 될 때까지, 긴 것이 짧은 것이 될 때까지 두리번거립니다. 쉬운 길을 찾는 대신 다른 길을 만들어봅니다. 느린 속도로. 불편함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모든 좋은 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거든요.


60

어느새 우리는 평범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잘 지내냐고 물으면 그럼 잘 지내지, 대답하는. 빤한 사이. 우리는 이제 "야, 나 어제 완전 열받았잖아"로 시작하는 통화는 할 수 없어졌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기에, 그리고 전처럼 서로가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는 일이 많지 않기에 생략하는 말들이 늘었다.


74

여행의 목적은 '목표한 장소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여행은 장소보다 '장소를 향해 나아가는 상태'를 중시한다. 여행은 '오다' 보다는 '가다'라는 동사와 더 잘 어울린다.


83

단단한 생각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 여행이다. 당분간 나는 이 단단한 생각을 가방처럼 메고, 일상을 거닐 것이다. 생각이 물렁해질 즈음 다시 가방을 싸게 되겠지? 아무리 나쁜 여행일지라도 여행은 생각을 싱싱하게 자라게 한다.


84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처음 듣는 음악이야. 가령 카페에 앉아 일을 할 때. 텍스트를 읽거나 지겨울 때 낙서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문득 어떤 음악이 들려올 때가 있어. 처음 듣는 음악. 그것은 흐르는 시간과 타성에 젖은 의식을 잠깐 동안 멈추게 하지. 움직이던 손가락과 눈꺼풀을 멈추게 해. 마치 뇌에 은하수를 붓는 느낌이야.


138

나는 인생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나를 나무라듯 이렇게 외쳤던게 기억난다. "인상쓰지 말고!" 그즈음 내가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인정한다. 나는 얼굴을 자주 찌푸리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어린이였다. 그렇지만 어떤 아이들은 세상만사가 아름답지 만은 않다는 것을, 어른들은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을 흉내내고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을 일찍 알게 되기도 하는 법이다.


143

왠지 '서점'이라는 말보단 '책방'이라 부르고 싶다. 책들이 모여 사는 방. 규모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도 좋지 않다. 규모가 커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라면 아늑한 맛이 없다. 반대로 규모가 작아 주인과 자주 눈을 마주친다면 느긋하게 책을 둘러보기 어렵다. 동네 책방이라면 '적당하다'는 말이 알맞은, '알맞다'는 말이 적당한 규모가 좋다.


157

그려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늘 실패했다. 상상이 언제나 경험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 끈질긴 '이미지'가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눈앞에서 출렁였다. 여든이 훌쩍 넘은 부모와 조그만 상을 놓고 밥을 먹는 아들. 구부정한 등 세 개.


159

다정함은 자세다. 뭔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내가 도와 줄게'라고 몸으로 말하는 것. 그것도 '미리' 말하는 것.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선물 자체가 아니다. 선물(마음)을 주고 싶어하는 상대의 '자세'다. 네가 좋아하는 것, 그거 해주고 싶은데, 해줄 수 있는데! 이런 말. 말이 전부다. 그게 선물의 시작이다. '말이면 다가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이도 있겠지만, 글쎄. 나는 어기더라도, 우선 다정한 말을 건네는 이에게 마음이 간다.


171

내가 두려워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사지가 짧아 보이고 거북목이 되어가는 것이다! 목! 목은 중요하니까. 목은 머리와 몸 사이에 난 '복도'다. 머리통과 몸통을 구분 짓고 이어주는 좁고 기다란 통로. 발레는 목과 어깨가 친해지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 장르다.


173

고수의 동작엔 '억지'가 없다. '쓸데없는 힘'이 없다. 힘을 뺀 듯 자연스럽고 에너지가 넘친다. 몸에 밴 리듬이 모든 동작을 춤처럼 보이게 한다. 그들은 다음 동작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행동한다. 나처럼 아마추어로 발레를 흉내내는 초보자들은 언제나 동작 만들기에 급급하다. 동작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춤이 아니다. 고수가 되기 전엔 춤이 아닌 것들 속에서 춤을 흉내낼 수밖에 없다.


214

누군가 죽는다면 그건 태어나는 자가 있기 때문이지. 누군가 울고 있다면, 어디선가 웃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지 모르고. 누군가 아프다면 아프지 않은 사람 때문일 수도 있다고.


세계는 서로 너무나 깊이, 연루되어 있다.


오롯이 혼자의 탓으로 잘못되거나 혼자의 덕으로 잘되는 일이란 없을지 모른다고. 날아가는 나비가 말한다.


244

전염 가능한 불치병에 걸린 여자에게서 바이러스를 빼고 '여자'만 바라보는 사람, 고철 더미에서 혼돈(쓰레기)을 빼고 '고철' 본연의 모습을 보려 애쓰는 사람. 쓰레기는 쓰레기가 아니고 병은 병이 아니게 될 때까지, 그는 얼마나 자기 생각과 싸웠을까? 생각이 다른 생각이 되기까지,


248

조르바는 행복을 편애하는 자가 아니라, 행복이 편애하는 자다. 불행은 쉽게 전염되지만 행복은 잘 전염되지 않는다. 행복은 능동적으로 찾아내고, 배워야 한다.


253

대부분의 책이 사는 일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한다면, 소설은 한 편에 한 번씩 삶을 '살게' 한다.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한번 더 살아본 기분이 든다.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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