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가 그랬다. 소설은 한 편에 한 번씩 삶을 '살게' 한다고. 처음 이 문장을 보고는 오 하면서도 그랬나? 싶었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체험 삶의 현장보다는 잘 읽히는 멋진 문장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 소설은 약간 체험 삶의 현장이다. 취업, 해고, 구조조정, 자영업, 재건축 등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주제를 다룬다.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처음 문장이 계속 생각났다.
목차부터 인생이 보인다. 크게 3부 구성인데 '1부 자르기, 2부 싸우기, 3부 버티기'다. 각 챕터별로 가장 좋았던 단편을 하나씩 고르면, '알바생 자르기', '현수동 빵집 삼국지', '음악의 가격' 이다. 특히 '음악의 가격'이 인상 깊었는데, 아래에도 발췌했지만 바로 옮겨보면,
"음악의 가격이 10년 사이에 100배, 어쩌면 175만 배 싸진 것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상품의 가격은 판매자의 노동이 아니라 구매자의 주관적 효용과 공급량, 보완재와 대체재의 가격에 달려 있다고 하니까요. 저는 다른 게 이해가 안 갑니다. 음악이 그렇게 싸져서 모든 사람이 거의 공짜로 음악을 즐기게 됐는데, 사람들이 음악으로부터 얻는 효용은 얼마나 늘어났나요?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 10년 사이에 175만 배나 100배, 아니 열 배라도 더 행복해졌나요? 오히려 반대 아닌가요? 사람들은 이제 음악을 공기처럼, 심지어 어떤 때는 공해처럼 받아들입니다. 음악은 이제 침묵보다도 더 값싼 것이 되었습니다. "
장강명 작가는 이런 뉘앙스로 질문을 던진다. 일단 알겠는데 좀 이상하지 않냐는 식이다. 그럼 맞아 이상해. 이상한 세상이야 싶다가도 그게 결국 삶인가 싶은.. 아무튼 감상은 각자의 몫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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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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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가 무슨 퇴직금이냐고 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법규를 찾아보니 아르바이트생에게도 퇴직금을 지급하게 돼 있었다. 일주일에 열다섯 시간 이상, 1년 이상 일한 피고용인이라면, 해고는 반드시 서면으로 통보해야 했다. 명확한 이유를 명시해서, 30일 전에. 회사가 이걸 어기면 지방노동위원회에 민원을 접수하면 된다. 그러면 사장에게 출석요구서가 날아간다.
40
걔 불쌍하다고, 잘 봐주려고 했었잖아. 가난하고 머리가 나빠 보이니까 착하고 약한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얕잡아 봤던 거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걔도 알바를 열몇 개나 했다며. 그 바닥에서 어떻게 싸우고 버텨야 하는지, 걔도 나름대로 경륜이 있고 요령이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해 본 적 없잖아?
82
그때 이 회사를 사려고 했던 게 중국인들 말고 또 있었습니까? 이 회사가 브랜드 이미지가 좋습니까? 기술력이 탁월합니까? 한국 자동차 시장이 미국이나 중국처럼 큽니까? 회사 주인이 중국인인데 기술만 한국인 것일 수가 있습니까? 우리나라 기업들이 외국 회사 샀을 때에는 선진 기술 보유할 수 있게 됐다면서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만들 수 있는 자동차와 살릴 수 있는 사람들 숫자가 모여서 큰 숫자가 정해지는 게 아니었다. 큰 숫자가 먼저 정해진 뒤 만들어야 하는 자동차와 사람들의 수가 정해지는 것이 순서였다.
법원의 산수에 회계사들이 살을 붙였다. 그들의 산수는 회사를 살리려면 사람을 최소한 35퍼센트는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90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도장 공장 옥상에 걸렸다. 해고는 살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산 자'가 되었다.
125
빵 장사가 왜 잠을 못 자는지 주영은 곧 이해하게 됐다. 아침에는 빵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밤에는 빵을 한 번에 많이 사는 손님들이 띄엄띄엄 왔다. 밤이면 야근이나 회식을 마치고 지친 사람들이 탄수화물에 끌리기도 했고, 할인하는 떨이 상품이 많기도 했다. 술에 취해 얼큰해진 아저씨들이 아내나 아이들에게 주려고 호기롭게 케이크를 사 가기도 했다.
134
비싼 물건을 싸게 사는 듯한 환상을 주기 위해 점원들의 노동이 동원되는 셈이었다. 프렌차이즈 본사는 매일 아침마다 다른, 복잡한 내용의 모바일 쿠폰을 뿌렸고,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고 가게로 찾아왔다. 매장에서 그 쿠폰들을 거부할 권한은 없었다. 동시에 모든 할인 제도를 빠짐없이 외워서 제대로 응대할 수도 없었다.
135
모바일 쿠폰을 가진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게에 왔다. 점원이 자신을 우습게 보지 않을지 의식하는 사람도 있고, 처리 시간이 오래 걸리면 쿠폰을 받기 싫어 꼼수를 부리는 걸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고작 1000원, 2000원 아끼려고 이 수고를 들여야 하나, 자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그 쿠폰은 지금 쓸 수 없다는 안내를 받으면 누구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멀쩡한 사람도 화를 내게 만드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화는 고스란히 점원이 뒤집어쓴다.
137
신문이나 책을 읽은 지 오래였다.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몰랐다. 생각은 온통 할인 제도와 그날 매상, 그리고 손님이 풍기는 분위기에 쏠려 있었다.
155
하은은 제빵 기사 교육 코스는 10주짜리이며, 반죽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제빵 기사 자격증은 없어도 되고, 본사도 점주도 부리기 쉬운 젊은 여성을 선호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것은 작은 돈이 정한 법칙은 아니었다.
164
동네를 새로 지을 때 땅을 깊이 파내면 재개발이다. 재개발을 할 때에는 세 들어 살던 사람에게도 이사비를 줘야 한다. 동네를 새로 지을 때 땅을 깊이 파내지 않으면 재건축이다. 재건축을 할 때에는 세 들어 살던 사람에게 이사비를 주지 않아도 된다.
똑같이 곰팡내 나는 빌라에서 똑같이 수십 년을 세들어 살았는데 왜 누구는 1000만 원을 받고 누구는 한 푼도 못 받는 거예요? 땅을 깊이 파고 덜 파고의 차이라니, 말장난해요?
당신은 쫓겨나는 게 아니라 계약이 해지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쫓겨나는 게 아니라고요? 그러면 내가 어디 가서 보증금 500만 원에 월 40만 원으로 방 두 칸짜리 집을 구해요?
176
빈집이 방치되고 쓰레기와 폐자재가 골목에 쌓이면서 동네 자체도 점점 흉한 몰골이 되어 갔다. 그런 장소에서 사람이,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이 현실감이 없었다. 선녀는 자신의 방이, 또 자신의 삶이, 흉한 것들 한복판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191
부위원장님, 난 요즘 뭐가 무서운지 알아요? 용역 애들이 우리 집은 아예 철거하러 오지도 않을까 봐 무서워. 그러면 이 상태로 계속 살아야 하잖아요.
205
경력이 없으면 취업을 못 하고, 취업을 못 하니 경력을 못 쌓고, 이 고리를 어떻게 깨야겠어요? 낮은 데서 시작해야지. 아나운서 아카데미 몇 달씩 몇 년씩 다니는 거, 도움 안 돼요. 학원비로 몇백만 원씩 갖다 바치고 배우는 게 있긴 해요? 사내 아나운서 하던 사람들이 자기 자랑하고 잡담하는 거 백날 들어서 뭘 하려고요? 현장에서 하루 일해 보는 게 훨씬 나아요.
지민은 교통 캐스터의 주장에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었다. 종편이나 보도 채널까지는 그 말이 옳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중파 3사에서는 '닳은 느낌'이 든다며 오히려 경력자를 기피한다고 들었다.
210
내새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스스로를 낮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처음 만난 사람들을 상대로 몇십 초 사이에 호응을 얻는 특별한 재주는 없었다. 아니, 그런 재주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전달력 있게 잘하는 것이었다. 매일 여섯 시간씩 신문과 방송 기사를 읽어 가며 갈고닦은 능력이었다. 아나운서 입사 지원서에 특기로 적어 낼 수 없는 단 하나의 능력이었다.
233
상사가 부정행위를 저지르면 어떻게 하겠느냐 따위를 묻는 면접관 말입니다.
신은 그런 건 오히려 회사가 직원들에게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최소한 그 부정행위가 어떤 건지라도 알려 주고 물어봐야죠. 그 상사가 뭘 어쨌다는 겁니까? 커피믹스 스틱을 몇 봉 집에 가져갔다는 겁니까, 아니면 시체를 토막 내서 비품 창고에 숨겨 놓았단 말입니까?
292
그 기사님 얼굴들이 참.. 학대받는 동물의 표정 같았다고 하면 너무 실례가 되려나요. 사람이 매일 혼나고 야단맏으면 움츠러들고 기를 못 펴는 태도가 몸에 배게 되잖아요. 딱 그랬어요. 그 제품이 불량이 자주 나기는 하나 봐요. 제 아내처럼 대리점 거쳐서 온 사람들은 센터 문을 들어설 때부터 심사가 꼬여 있을 거고요.
304
소비자가 스트리밍 서비스로 한 곡을 들을 때 뮤지션이 가져가는 돈이 1원도 안 된다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한 곡을 재생하면 매출이 7원쯤 발생하는데 거기서 1.3원쯤 되는 돈을 작곡자, 작사자, 편곡자, 보컬, 연주자가 나눠 갖는다고 했다. 그 1.3원도 서비스 가입자가 아무 할인을 받지 않고 정가로 서비스 요금을 낼 때 얘기였다.
306
폐허 위에 폭탄이 터져 봤자 폐허잖아요. 음원 다운로드로 한 달에 10만 원 벌다가 스트리밍으로 2만 원 벌게 되면 벌이가 8만 원 줄었다고 느끼지, 수입이 80퍼센트 감소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죠.
314
강연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내용이 아님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람들은 콘텐츠가 아니라 아우라를 원한다. TV에 나오는 유명인을 직접 만난다는 경험은 콘텐츠보다 더 큰 주관적 효용을 주며, 공급량이 적고, 복사나 전송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책보다 강연에 더 큰 금액을 지불하는 것 역시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합리적인 소비였다.
319
한국에서는 기획사들이 아이돌을 상상의 연인으로 포장해 팬 미팅 티켓과 한정판 굿즈를 팔았다. 유사 연애는 한국 음악 시장에서 몇 안 되는 검증된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공영방송에서 야심 차게 시작한 밴드 경연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밴드의 연주 대신 멤버들의 감동적인 인생 사연을 보여 줬다. 그나마도 시청률이 낮아 오래가지 못했다.
323
이미 세계의 질서가 정해졌는데 거기에 맞서는 기획이 얼마나 가망이 있을까. 질서는 시스템이고 기획은 이벤트다. 이벤트는 시스템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성 평등 운동, 소수자 인권 운동, 환경 운동, 동물권 운동, 그런 기획들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거대한 질서가 새로 생길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변화를 잘 타고 미끄러지는 것 정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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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가격이 10년 사이에 100배, 어쩌면 175만 배 싸진 것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상품의 가격은 판매자의 노동이 아니라 구매자의 주관적 효용과 공급량, 보완재와 대체재의 가격에 달려 있다고 하니까요. 저는 다른 게 이해가 안 갑니다. 음악이 그렇게 싸져서 모든 사람이 거의 공짜로 음악을 즐기게 됐는데, 사람들이 음악으로부터 얻는 효용은 얼마나 늘어났나요?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 10년 사이에 175만 배나 100배, 아니 열 배라도 더 행복해졌나요? 오히려 반대 아닌가요? 사람들은 이제 음악을 공기처럼, 심지어 어떤 때는 공해처럼 받아들입니다.
음악은 이제 침묵보다도 더 값싼 것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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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 우리가 매일 이야기하는 한낮의 노동과 경제 문제들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장면들을 단순히 전시하기보다는 왜, 어떻게, 그런 현장이 빚어졌는지를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공감 없는 이해는 자주 잔인해지고, 이해가 결여된 공감은 종종 공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