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_ 금정연

by 라용
P1010011.JPG

누가 추천하는 책을 잘 읽는 편이다. 중요한 건 책 내용보다 '누가' 추천하는 지다. 이 책을 읽게 한 인물 두 명을 소개한다.


1. 이슬아

나는 이슬아가 유명해지기 전에 '일간이슬아' 홍보 글을 보았는데, 그가 유명하기 전이라 구독하지 않았다. 이후 그가 유명해지자 언리미트 에디션에서 매우 두꺼운 '일간이슬아 수필집'을 샀고, 지금까지 쭉 이슬아의 '독자'로 지내고 있다. 그 이슬아가 이 책에 대한 글을 썼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을 쓴 '금정연'에 대해서. (글 제목 「서평가평가」) 이슬아는 실패를 모르고 싶어서, 멋지고 싶어서, 금정연의 책을 자주 다시 읽는다고 했다.


2. 기명균

나는(아마 당신도) 기명균을 전혀 몰랐는데, 디에티트 사이트를 들락거리다 우연히 그가 쓴 서평을 보았고, 그 글이 너무 재미있어서 기명균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기명균은 내가 좋아하는 '퍼블리'의 에디터였고, 낱말퍼즐 책을 두권이나 낸 작가였다. 담배를 싫어하는 그가 '담배와 영화'라는 책을 굳이 소개했는데, 그 이유는 저자가 '금정연'이라서.. 가 전부였다.


이렇게 끝내면 기대가 너무 크겠다...(약간 걱정) 어쨌든 나는 '금정연'의 글을 계속 읽을 예정이다.


-


발췌


18

간결하고 선명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는, 이런 문장을 쓰고 있는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실패를 모르는, 한마디로 멋진 문장들을 가지고.


22

일상이 망가져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방치하는 게 아니라 자질구레한 일들을 방치해서 일상이 망가진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야 하는 나이가 된 탓이다. 침대에서 멀어지는 걸음걸음마다 나는 거듭해서 마음을 먹는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마음까지 먹어야 하다니, 빌어먹을, 벌써부터 소화제를 찾고 싶어진다.


27

완벽한 첫 문장을 찾는 데 실패했다면


그렇다면 두 번째 문장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다.

- 베르나르 키리니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57

"조금 비참한 게 영혼에는 좋아요."

- 세스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68

"자네한텐 불행하다는 대답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을 했을 때 그 애의 미소를 봤다면 절대 그럴 수 없지. 아무렴, 그 애는 행복하게 살았어. 말없이 수긍하며 사는 삶에 만족했어."


75

말이란 본디 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겐지의 말에는 공허한 꼰대들의 잔소리와는 달리 스스로 그것을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박력이 있다.


81

그리하여 연필 깎기의 기술은 삶의 기술이 된다. 연필 촉을 완벽하게 가다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평범한 우리들의 삶이다. 어디 그뿐인가. 깎으면 깍을수록 짧아지는 연필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수록 우리의 남은 시간은 점점 짧아질 뿐이다. 그것이 바로 향나무와 흑연의 쌉싸래한 연필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야만 한다.


90

우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자신과 반대편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악마 같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손해 보는 장사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악마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악마의 배만 불릴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린다.


어른이 되는 건 곤란한 일이다. 충분히 운이 좋지 않다면 먹고사는 생각에 짓눌려 좀처럼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아니, 운이 좋다고 해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아무리 잘 먹고 잘산다고 해도 더 잘 먹고 잘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니까.


99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습니다."

-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105

<피너츠>의 주제를 묻는 독자에게 슐츠는 이렇게 말했다. "굳이 찾아보자면 찰리 브라운이 항상 패배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게 주제 아닐까요?"

어린 내가 <피너츠>의 세계에 빠져든 건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기는 건 근사하지만 그만큼 힘이 드는 일이다. 지나치게 노력하거나 상심하는 대신 패배에 익숙한 찰리 브라운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건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던 셈이다. 찰리 브라운은 매일 한숨을 쉬며 말한다. "못 참겠어." 그리고 그는 참는다. 찰리 브라운, 참 좋은 녀석이지!


114

그런데 과연 이런 요약이 옳은지 모르겠다. 단지 한 권의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평소에 별 생각 없이 스쳐지나가던 이들의 삶에 대해 뭐라도 아는 양 이야기해도 좋은가? 그것은 그들의 땅 뿐만 아니라 이야기까지 빼앗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하자.


119

하나의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그들'의 서사에 편입되지 못했던 수많은 구성원들의 목소리다. 요약을 거부하기에 종종 생략될 수밖에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목소리들이다.


135

"특별한 존재와 평범한 존재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존재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관계다. 남에게는 평범한 존재가 내게는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존재가 나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 평범한 존재는 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특별해진다."

- 장유승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157

바틀비에게는 우리가 누군가의 요청, 특히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지시나 부탁을 거절할 때 드러내고야 마는 불안과 분노, 초조와 불손 같은 '평범하고 인간적인' 기색이 없다. 그는 무엇도 부정하지 않는다 - 단지 거절할 뿐.


204

체스터턴은 이렇게 쓴다. "어떤 것이 오로지 우아함을 위해 존재한다면, 우아하게 그것을 하든지 아니면 하지 마라. 어떤 것이 엄숙한 척 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엄숙하게 그것을 하든지, 아니면 하지 마라. 어정쩡하게 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거기엔 어떤 자유도 없다."


242

"남의 말은 그만 인용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산 자들 _ 장강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