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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커피와 담배 _ 정은

by 라용
커피와 담배.JPG

'시간의흐름' 출판사 기획 시리즈 '말들의 흐름' 첫 번째 책 '커피와 담배'를 읽었다. 말들의 흐름은 '커피와 담배', '담배와 영화', '영화와 시'.. 이런 식으로 낱말을 이어가며 10명의 작가가 10권을 책을 낸 기획 시리즈다. 원래 두 번째 책인 금정연 작가의 '담배와 영화'를 보러 갔다가 첫 번째 책 '커피와 담배'를 사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담배와 영화'보다는 '커피와 담배'가 어울린다.


나는 커피는 마시고 담배는 안 피운다. 커피도 커피믹스나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편이라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커피 취향과 거리가 멀다. 그래도 왠지 '커피와 담배' 하면 끌리는 게 있다. 무용하면서 유용하달까. ㅁㅁ 없이도 살 수 있지만 ㅁㅁ 없으면 못 산다고도 하는, 그런 것들. 어찌 보면 ㅁㅁ은 비교적 쉽게 누군가에게 살아갈 여유를 주기도 한다.


책은 커피와 담배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기록을 담고 있다. 담배는 안 피우고 커피믹스를 주로 마시는 나도 재미있게 읽었으니 커피와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다.




발췌


11

살다 보면 인생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야 할 때가 찾아온다. 무언가를 더할 여유가 있는 운 좋은 때가 있는 반면에 끝없이 빼고, 빼고, 또 빼야 할 때도 있다. 그런 시기는 운과 상관없이 찾아온다. 가질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조용히 받아들여야 하는 때. 원하는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포기할 것을 골라야 한다는 걸 알게 되는 때.


15

작은 변화를 미리 감지하는 사람, 더 크게 확장하여 느끼는 사람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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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민해진 감각으로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새롭게 깨닫고, 세상의 경계를 더 넓히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여기까지 와서 커피만 마시고 있는지. 아니, 커피를 마시러 왜 여기까지 와야 했는지. 커피가 내게 주는 답이 분명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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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나만의 커피 한 잔이 내 앞에 놓일 때면 비로소 떠돌던 마음이 그 커피잔을 잡고 땅에 닿도록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18

커피는 내가 나를 사랑하고 대접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다. 커피는 민주적이다. 커피는 쉽게 손을 내밀어준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가 발을 반쯤 걸치고 삶의 여유를 꿈꿔볼 수 있게 한다. 커피마저 없다면 내 삶은 무미건조하고 비참해질 것이다. 커피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거기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27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데 걸리는 시간은 몇 분일까? 그 시간은 항상 같지만 또 같지 않기도 하다. 그 시간들은 때때로 길어지거나 짧아질 수 있으며 그걸 극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수단이 사랑 혹은 죽음일 것이다. 내가 탄 차가 전복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차가 전복되던 순간에 시간이 갑자기 다섯 배 정도 느리게 흘러가는 것을 감각했었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우리가 시공간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열정에 휩싸여서 그를 사랑하고 있을 때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량이 순식간에 수십 배가 되어버린다.


35

맥심 커피믹스의 배합 비율은 황금 같아서 어지간해선 그 맛을 좋아하지 않기란 어렵다. 나는 라테는 물론 아메리카노도 커피로 치지 않는 커피에 대한 하드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인생의 마지막 커피를 마셔야 한다면 맥심 커피믹스를 선택하겠다. 한국인에게 맥심은 커피 이상의 무엇 같다.


45

처음엔 스님들 수행하시는 데 방해되는 마구니 같은 존재가 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조차도 나의 욕심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거나 누군가의 마음에 담기는 것도 욕심,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누군가가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게 하는 것도 결국 다 마찬가지로 욕심이었다. 나쁜 인연보단 좋은 인연이 좋겠지만 그보다는 인연을 아예 만들지 않는 게 좋다는 S스님의 말을 나는 마음에 굳게 새겼다.


53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 후 몇 달 지났을 때,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선 쇼핑으로 한 달 치 월급을 다 써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잔고가 0이라면 차라리 돈을 안 벌고 스트레스를 안 받고 돈을 안 쓰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64

처음부터 담배는 나를 타인과 연결해주는 도구였다. 같은 시공간에서 담배를 태우는 것은 손을 들어 인사를 나누는 것보다 가깝고 악수를 나누는 것보다는 먼, 딱 그 정도 거리감의 친밀감을 형성한다. 그 친밀감은 수직선보다는 수평선에 가깝다. 그것은 담배가 타는 동안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65

담배와 건강엔 분명히 연관관계가 있지만 '담배=발기부전' '담배=암' 이런 식의 단답형의 인과관계는 없다고 믿고 싶다. 우리의 몸은 정신만큼이나 다채롭고 복잡하니까 누구에게나 일관되게 적용되는 법칙 같은 것은 없겠지. 담배 한 개비의 영향과 가치는 다 다르다고 믿고 싶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나에게 담배 한 개비가 어떤 의미를 가지냐일 뿐.


67

담배를 피우는 것은 단순히 담배를 피우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기억을, 감정을 소환하는 의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83

담배를 끊으면 담배를 피우는 내 모습도 잃는다. 담배를 피울 때는 하루가 피우는 담배 개수만큼 분할된다. 하루에 3개 혹은 12개 혹은 20개로. 하나의 담배와 또 다른 담배 사이의 간격만큼 분할되던 하루가 분할이 안 된 채 붕 떠 버린다. 시간관념 체계가 엉망이 되어버린다. 아침 담배와 함께 시작하던 오늘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다. 계속 어제를 살고 있는 기분이다.


85

그 모든 것들을 끊으니 새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양질의 숙면을 취했고, 아침마다 가벼운 몸으로 일어났으며 날마다 창조력이 솟아올랐다. 커피와 담배가 위대한 작품을 낳는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위대한 작품은 쾌적하고 건강한 몸이 쓴다. 숙면이 창조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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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담배 없이 숙면의 힘으로 훌륭한 작품을 생산하는 삶보다는, 그냥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괴로워하며 그럭저럭한 글을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86

조금 더 나이가 들자 세상에 약점 잡힐 일을 일부러 만드는 사람이 어른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약점이 있는 사람이 더 매력적이고, 책임지고 감당하겠다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더 어른 같다.


89

그를 제대로 아는 게 존중이 아니라 그가 나를 제대로 알도록 해주는 게 존중이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110

노량진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모두들 예민하고 그래서 서로 신경 쓰고 배려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비슷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만 명 단위로 모여 있을 때는 그 에너지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솔직히 숨 막혔고, 우울했다. 아니라곤 말 못하겠다.


113

각자 나름의 어려움이 있는 법이고, 누구도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도 모두가 서로에게 잘못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순간들이 분명 있다.


114

그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너무 집중해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그의 질 나쁜 농담들은 음절로 낱낱의 소리로 분해되었다. 그 소리는 내 뇌를 지나쳐 그냥 사라졌고, 나는 다만 소리일 뿐인 목소리를 담았다. 그 내용을 내 머리에 담아서는 안 된다. 그 내용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124

지속적으로 오는 손님들이 꽤 되어서 가게는 한결같은 적자로 유지되고 있다. 뭐든 한결같으면 좀 버틸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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