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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대훈 Aug 18. 2023

대륙의 피 한반도의 아들,  개인 기억과 집안의 역사

​천년도시는 어떻게 만드는가. 10


자신의 뿌리와 지리는 실존의 출발점


나는 아름다운 익산시, 어머니 친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있는 대전에 미리 오셨고, 3살이 되는 해, 외할머니께서는 손자를 등에 업어 대전지방법원 뒤 선화동 집으로 데려다주셨다. 감나무 집 선화동에서는 여동생이 태어났다. 이후 부모님은 성남동으로 이사를 하셨고,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용전동과 정동에서는 중학교를, 태평동에서는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둔산에서는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 출근하는 사무실은 대흥동에 있다. 이렇게 유년기부터 60년 가까이 대전에 살면서, 한 도시의 성장과 정체, 실망과 희망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익산시 왕궁리 오층석탑, 내 성씨의 본관은 경상남도 진주이며, 나는 박사공파의 세손이다. 姜씨의 시조는 고구려 영양왕 때 병마도원수를 지낸 강이식 장군이시다. 고구려 사람의 본향이 경남으로 간 것은 통일신라 시대, 시조의 후손이신 강진(姜縉)께서 진양후에 봉해져서 관향을 진주(옛 지명, 진양)로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인 성씨의 대다수가 신라계 또는 고려계이지만, 다수 인구 성씨 가운데 고구려계 성씨는 진주강씨가 유일하다. 진주강씨의 집성지는 경상, 전라. 충청, 경기, 황해, 평안, 함경도에 두루 있는데, 중국 동포 가운데 진주 강씨를 본적이 있다. 내 집안의 직계는 근세에 호남에 사셨고, 진주강씨의 30세손인 나는 백제의 왕도 익산 출생으로 충청의 중심도시인 대전에서 자랐다)





사람이 자신의 혈통을 존중하고 태어난 곳과 뼈가 자란 장소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고고시절 역사에 관심이 생겼다. 논산과 부여에 있는 계백장군 유적이나 동상을 볼 때마다, 오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분투하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계백장군께 말할 수 없는 죄송함을 느꼈었다 . 그것은 경남 진주를 본향으로 한 내 성씨의 할아버지들께서 신라군으로 참전하셨을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러나 곰곰히 년도를 따져보니, 진주강씨는 고구려 사람이 통일 신라 시대 이후 진양후에 봉해진 것으로, 백제와 신라 전쟁에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 지역의 후손이 된 사람으로써 안도의 숨을 쉰 적이 있었다. 이렇게 내 집안의 역사를 살펴보니, 나는 대륙의 피를 받은 한반도의 아들이다. 


 

(성남동, 좌측 앉은 자리에서 6번째, 굵은 가로줄 셔츠가 5살 때 필자. 대전은 팔도 사람이 모여 만든 도시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북 피난민이 대거 대전천 인근에서 장사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내 어린 시절 성남동에서도 이북 실향민이 사는 판자촌이 있었다. 당시 귀했던 카메라 앞에 판자촌 윗동네 형들이 대거 내려와 포즈를 취했다)




어린 시절, 계족산 기슭은 아버지와 산책길이었고, 여름이 되면 온 가족이 안영리와 괴곡동 흑석리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동무들과 신탄진과 금강까지 마실 갔다가, 미숙한 수영에 물에 빠지고, 참외 서리도 하면서 자랐다. 청소년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은 한밭 곳곳의 산과 언덕, 천, 골목과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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