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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나무 Feb 17. 2016

엎드려 발을 까딱거리며

임신한 자의 로망_엎드려 놀기

 베개를 팔꿈치로 짚으며 바닥에 엎드린다.  왼쪽 팔을 구부리고 그 위에 왼쪽 귀를 내려놓는다.  오른손에는 색연필을 쥐고 의미 없는 낙서를 한다. 발은 까딱까딱 허공을 움직인다.


재미있겠다. 종일 앉아있던 허리가 시원해지겠다. 상상만 한지 4개월이 흘렀다. 지금 나는 거실 바닥에 베개를 놓고 왼쪽으로 누웠다 오른쪽으로 누웠다를 반복하고 있다. 며칠 전에 별 모양 매트를 사서 거실에 깔았다. 남편에게 방에서 인견 이불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몸  아래쪽을 덮어 가렸다. 입고 있던 치마를 벗었다. 신혼 초 집에서 섹시한  척하고 싶을 때 입던 스판 미니스커트였다. 배가 조여서 이제는 못 입겠다. 일어나 앉았다가 다시 누웠다. 소파에  기대앉았다. 저녁을 너무 먹었나 보다. 아니 수박만 덜 먹었어도 나았을 텐데. 숨을 쉴 때마다 배 쪽의 피부가 더 이상 팽창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다. 조심스럽게 숨을 몰아서  들이마셨다가 내쉬어본다. 배가 터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다시 바닥으로 가서 눕는다. 이리저리 누워봐도 여전히 불편하다.


한쪽 팔로 바닥을 누르며 몸을 일으킨다. 바닥에 있던 책을 집어 읽는다. 남편이 아내에게 "물" 또는 "마실 거"라고 말하면 아내는 무얼 하고 있든 물을  가져다준다는 내용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결혼 에세이다.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이라고 해본다. 남편은 이어폰으로 무언가를 듣고 있다. 안 들리나 보다.  다시 한번 말한다. "물!" 한번 더 크고 길게. "물~~~!!" 남편이 이어폰을 빼며 "네?"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물." 남편이 벌떡 일어나 물을  가져다준다. 기분이 좋아진다. 물이 시원해서인지 에쿠니 가오리의 남편을 따라 해봐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도 잠시다. 물을 마셨더니 배가 더 부르다. 책과 노트북을 싸들고 집 앞 카페로 나가면 시간이 잘 갈 것 같다. 걸어가는 동안 배도 좀 꺼질 것이다. 꼼짝할 기운이 없다. 어제는 동네 산책을 하니 더워도 기분이 좋았는데 오늘은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다. 나는 게으른 임산부다.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보내주어야겠다. 내일은 또 다른 밤이 오겠지 생각하고 다시 왼쪽으로 눕는다.


 나는 그날 밤 딱딱한 거실 바닥에 누워 세 시간을 잤다. 남편이 방에 가서 자자며 깨우길래 몇 시냐 물으니 새벽 한 시란다. “왜 안 깨웠어~~~ 나 다섯  시간밖에 못 자고 출근해야 하잖아!”라고 억지를 부린다. “지금까지도 조금 자기는 잤죠…” 남편이 풀 죽은 목소리로 답한다. 일어났더니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프다. 겨우 씻고 나왔다. 남편이 또 한번 “안 깨워서 미안해요. 곤히 자길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자정이 넘어도 거실에서 자고 있으면 깨워달라고 했었다. 남편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앞으로 똑바로 해요." 괜히 한번 더 투덜거리고 침대에 눕는다.

임신 25주 2일 차. 이미 배가 불러 있으니 배가 터져버리기 전에 그만 먹자는 교훈을 적어두고 싶은 밤이었다.




+ 지금은 출산 12주 차. 엎드려 놀고 싶었다는 것을 까먹고 살았다. 그럴 틈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아기를 눕히고 그 옆에 엎드린다. 발을 까딱거려본다. 허리가 시원하다. 모유 수유 때문에 상처가 아물 틈 없는 가슴이 아플 것 같았다. 생각보다 괜찮다. 왼쪽 팔에 얼굴을 내려놓고 아기 얼굴을 쳐다본다. 예쁘다. 상체를 일으켜 오른손으로 아기 얼굴을 만지작거린다. 아기가 나를 쳐다본다. 눈을 맞추고 웃어주었다. 아기가 따라 웃는다. 아기 옆에 등을 대고 누웠다. 아기가 요즘 좋아하는 컬러 초점책을 펴 들었다. 아기가 보는 것을 나도 함께 보고 있다. 초점책을 멀리 들어 올렸다가 날아오듯 다시 가져와 아기 코 끝에 대 준다. 요즘 자주 해주는 놀이다. 임신 중에는 매일 배가 불렀는데 지금은 항상 배가 고프다.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고 나면 배고프다. 안아서 재우고 나면 배고프고 먹고 있어도 배가 고프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못하게 된 것만 많아졌다고 생각했었다. 엎드려 놀고 나서야 알았다.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도 있었다. 그렇구나 하고 나니 보인다. 할 수 있게 된 것이 더 많다. 저 작은 아기를 마음껏 껴안을 수 있다. 아기가 자다가 눈 뜨고 웃는 모습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다. 이런 생각 하다 보니 낮잠 자고 있는 아기를 깨우고 싶어 진다. 정신 차려야지. 깨기 전에 좀 더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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