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여자의 땡깡
평소 나의 귀가 시간은 저녁 11시에서 12시 사이였다.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서 잠만 자고 다시 출근 했다. 결혼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철역에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문자를 보낸다. 남편이 시간에 맞춰 나와 있다. 좋았다. 남편은 한번도 빠짐없이 마중을 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떨렸다. 어제가 끝이었으면 어떡하지 오늘은 안 나왔으면 어떡하지 걱정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이런 걱정 덕분에 나는 남편의 마중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매일 새롭게 고마웠다.
마중 신혼은 3개월까지였다. 아기가 생긴 후로는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갔다. 아무도 만날 기운이 없었다. 티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드라마는 본방 시청에 이르렀다. 10시 드라마 본방은 밖에서 노느라 볼 수 없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드라마에서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다. 멈추려고 애써본다. 멈추려고 술을 마신다. 하지만 그 술의 힘으로 전화를 건다. 집 앞으로 간다. 멈추지 못한다. 결국 상처받는다. 또 술을 마신다.
드라마를 보다가 방에 있는 남편에게 간다. “나도 실연당해서 술 먹고 싶어요. 막 안될 것 같은 사랑하구서 상처받아가지고 술 진탕 먹고 싶다고!”라고 진상을 피운다. 남편은 “아이 안돼요.”라며 안아준다. “왜요, 왜 안되는데요. 나 하고 싶어요. 왜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못하게 해요?” 땡깡을 피우는 것으로 욕구를 약간 해소한다. 나는 실연 당할 일 없는 유부녀고 술 마시면 안되는 임신부다. 드라마에 점점 빠져든다. 드라마에서는 별 일이 다 일어나고 별 나쁜사람이 많다. 계속 이런걸 봐도 되나 싶다. 그러다 다행히 착한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선하고 매력적인 남녀가 각자의 이유있는 사랑을 한다. 악역이 없다. 그래도 사랑은 쉽지 않다. 울고 웃고 멍때리는 그들의 젊은 시간이 지나간다. 나는 드라마에 집중한다. 끝나고나서 겨우 숨을 쉰다. 배를 어루만지며 말한다. “꿈꿈아! 너도 사랑 많이 해라! 이제 엄마는 못한다. 엄마는 끝났다. 망했다. 그러니까 너라도 많이 많이 해라.” 옆에 있던 남편이 그게 뭐냐며 웃는다.
나중에 내 딸이 사랑을 하면 어떨까. 내 딸은 자기 사랑 얘기를 나에게 해줄까. 드라마 보듯 재미있게 들을 수 있을까. 상처 받는 길로 갈까봐 전전긍긍하게될까. 상처 받더라도 가고 싶으면 다녀오렴 하며 기다려줄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본다.
"너무 힘들다. 지친다." 이십대의 어느 지점에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몇 번 있었다. 이 순간이 빨리 끝났으면 지나갔으면 하고 바라지 않았었다. 이것도 한 때라는 것을 울면서도 알았던 것 같다. 마음껏 울고 멍하게 있고 술을 마셨다. 언젠가는 이런 뜨거움을 마주할 일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 때 빨리 지나가버리라며 누리지 못했더라면 아쉬울 뻔 했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말고기억해줘요.’
한 때 흥얼거리면 무조건 울 수 있는노래였다. 일 때문에 힘들었을때 사람 때문에 사랑 때문에 힘들 때도 이 구절을 흥얼거렸다. 덕분에 엉엉 울었다. 세월이 가면 이 터질듯한 감정이 잊혀질 수있다는 것이 안심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가도 지금 이만큼 아팠던 것은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 울었고 더 아파했다.
임신중인 지금도 호르몬 때문인지 가끔 눈물이 터진다. 이십대의 눈물과는 조금 다르다. 이십대 눈물은 언제 멈출지 알 수 없었다. 밤을 새서라도 울 기세였다. 오늘 울어도 내일 또 울었다. 지금은 잠시 운다. 그리고나서 지금을 산다. 어느 쪽이 더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 눈물도 지금 눈물도 마음에 든다는 것은 안다. 눈물을 소중히 여기고 눈물이 전하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내가 좋다. 이제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사랑에 흘릴 눈물은 없을지 모른다. 뱃속의 내 딸이 사랑에 가슴이 뛰고 눈물이 흐르는 순간을 함께하고 싶다. 이십년 후 빠르면 십년 후에라도 딸이 나에게 그런 기회를 주기를.
D+96
출산 96일차. 지금 내 딸은 내 왼쪽 어깨에 오른쪽 뺨을 기대고 내 심장 위에 자기 심장을 포갠 채 자고 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눈빛일 때가 있다 하지만 아직 장난감을 입으로 겨냥하지 못해 코와 눈을 찌르는 단계다. 딸의 사랑이야기를 듣는 행운을 누리고 싶다. 잊고 있던 임신기의 마음이다. 그러기 위해 하루하루 나는 이 작은 아기에게 신뢰를 쌓아가야 할 것이다.
판단하는 대신 궁금해 할게. 이해하고 감탄해줄게. 그런 하루들이 쌓인 뒤에도 내게 사랑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수 있지. 아쉽지만 그 또한 이해하는 엄마가 되어줄게. 하지만 친구도 남자도 일도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우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래. 지금 우리의 하루들이 생생한 너로 살 수 있게 하기를. 사랑해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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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왼쪽 어깨랑 팔이 다 저리다. 이제 다 썼으니 고만 깨울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