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세대 아파트 한 동, 1€에 파세요~

역대급 실험정신 - 네덜란드 건축 탐방기 ① Kleiburg Flat

by 파마
10년 전 대학시절 교환학생으로 네덜란드에 머무른 이래 '네덜란드 사대주의'에 물들게 된 필자입니다. 이에 다소 객관성을 잃은 글이 나올까봐 심히 염려 중이니 독자분께서 자체적으로 필터링하시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이 시리즈는 2017년 12월 네덜란드에 방문,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이라는 두 도시를 중심으로 실험적인 건축물 및 도시재생 사례를 탐방한 견문록입니다.
등장하는 모든 장소에 직접 방문했으며, 등장하는 모든 관계자와도 직접 대면 인터뷰했습니다. 이토록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여 작성하는 글이나, 필자의 영어 리스닝 실력 부족에 기인한 정보 오류가 존재할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네덜란드 수도인 암스테르담 남부 베일머르(Bijlmer) 지역에는 벌집 모양의 아파트 단지가 있습니다. 도시 개발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정부의 야심찬 계획 하에 지어진 대단지 아파트입니다. 그 규모가 대단히 커서 달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암스테르담 남부 베일머르(Bijlmer) 지역에 위치했던 벌집 모양의 아파트 단지 모습

하지만 1992년 10월, 비행기가 추락하며 이 아파트 한 동과 충돌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서 지역은 급속도로 쇠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울한 분위기에 주민들이 빠져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된 끝에 결국 모두가 외면하는 죽음의 마을이 됐습니다.

xxl.jpg 비행기 충돌 사고로 황폐화된 벌집 모양 아파트

사고를 당한 건물은 물론 주변의 건물들까지 하나 둘 씩 철거됐습니다. 클레이뷔르흐 플랫(Kleiburg Flat) 역시 사망선고를 받고 철거를 기다리던 신세였습니다. 네덜란드 주택공사의 추산에 따르면 이 건물을 철거하는 비용만 700만 유로(약 90억 원), 철거 후 재건축 하는 비용은 7,000만 유로(약 900억 원)에 달했습니다. 상당한 비용 때문에 선뜻 철거에 나서기도 어려웠습니다. 클레이뷔르흐 플랫(Kleiburg Flat)은 그야말로 계륵일 뿐이었습니다.


이때 이 구역의 미친 X이 등장합니다. 이 계륵을 1유로에 사겠다고 주택공사에 딜을 걸어옵니다. 주택공사는 이때다 싶어 철거비용만 700만 유로짜리 건물을 1유로에 판매합니다. 사는 사람도 파는 기관도 지나칠 정도로 파격적입니다.


그 파격을 제시한 자는 바로 잔더르 페르묄런 빈드산트(Xander Vermeulen Windsant, 이하 XVW)라는 건축가였습니다. 직접 만나 인터뷰해보니 미친 게 아니라 몹시도 기발한 혁신가였습니다. 돈 벌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여러 모로 범상치 않아 경외심 마저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XVW와 세 친구는 최소한의 비용을 투입해 노후된 건물의 리모델링을 진행했습니다. 외벽, 주차장, 엘리베이터, 현관 등 이른바 '공용 면적'에 해당하는 부분들을 때깔 좋게 현대화했습니다. 500세대의 가구 내부도 최소한만 고쳤습니다. 여기에 든 돈이 300만 유로입니다. 철거비용 700만 유로의 절반도 안되는 비용입니다. 철거 후 재건축까지 포함한 예상비용 7,000만 유로와 비교하면 고작 4%에 불과합니다.

SP2015-Kleiburg-3-HiRes-900x600.jpg 최소한, 정말 최소한만 고쳐서 어딜 고쳤는지도 알 수 없는 내부

XVW는 이 무성의한(?) 미완의 상태로 입주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사를 완성할 계획도 없는 채로 말입니다. 이유는 바로, 아파트의 컨셉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D.I.Y'였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아파트입니다!"


이 한마디는 인테리어와 디자인에 관심 많은 예술가들, 취향과 개성이 확고한 젊은이들의 욕망을 제대로 저격했습니다. 그리고 시세보다 확연히 저렴하게 책정된 분양가(약 1억5천만 원)는 암스테르담 도심 인근에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신혼부부들의 꿈을 자극했습니다. 그렇게 500세대가 완판됐습니다.

SP2015-Kleiburg-5-HiRes-900x599.jpg 기꺼이 D.I.Y 셀프 인테리어를 택한 사람들

예비 입주자들에게는 1년의 리모델링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이들은 수시로 (곧 살게 될) 내 집에 드나들며 셀프 인테리어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이때 예기치 못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아직 이웃사촌이라고하기에는 너무 먼, 이웃팔촌 정도나 될까 싶은 예비 입주자들 간에 견고한 네트워크가 쌓인 것입니다.


엘리베이터에 메모가 하나 둘 쓰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서로의 재능과 노하우를 공유하는 옐로우페이지가 돼버렸습니다. "저는 목공 전문가입니다. 필요하신 분 연락 주세요. 101호", "조명 설치 노하우가 궁금하신 분 102호에 물어봐주세요", "쇼파 구입 예정이신 분, 103호와 같이 가요." 상상컨대 이런 메모들입니다.

Kleiburg 427 - 3.jpg 500세대 완판에 빛나는 클레이뷔르흐 플랫(Kleiburg Flat) 입주 후 모습

500세대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개성 넘치는 아파트 클레이뷔르흐 플랫(Kleiburg Flat)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이미 입주 전 1년 동안 상부상조해가며 공고하게 정을 나눈 입주자들이 살고 있는 500세대 아파트입니다. 당연히 수도 없는 파티가 자발적으로 열렸습니다. 그야말로 '공동체'의 탄생입니다. 클레이뷔르흐 플랫(Kleiburg Flat)이 활기를 띠자 인근 마을에도 점차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한 건축가의 재기발랄한 아이디어 덕에 모두가 등돌렸던 죽음의 지역 베일머르(Bijlmer)는 이렇게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klushuizen-klushuizen-in-de-flat-kleiburg-01.830x0.jpg 1년간의 셀프 인테리어 도전하며 끈끈한 전우애가 생긴 주민들이 파티를 여는 모습

지은지 40년이 넘은 노후 아파트가 500세대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아파트로 변했습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음울해진 마을이 자발적으로 맺어진 끈끈한 네트워크로 정이 쌓이는 마을로 변했습니다.


이처럼 허물지 않고도 도시를 살려낼 방법은 있습니다. 건설에 드는 막대한 비용과 커뮤니티 구축에 드는 사회적 비용을 크게 절감하면서도 말입니다. 황폐화된 마을에 온기와 활기를 모두 불어 넣은 진정한 도시재생 사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클레이뷔르흐 플랫(Kleiburg Flat)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훈 : 기왕 미치려면 곱게 미치자! 나는 돈 벌고, 도시는 살아날 수 있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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