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안의 하룻밤, 크레인 위의 하룻밤

역대급 실험정신 - 네덜란드 건축 탐방기 ② Lloyd Hotel 外

by 파마
10년 전 대학시절 교환학생으로 네덜란드에 머무른 이래 '네덜란드 사대주의'에 물들게 된 필자입니다. 이에 다소 객관성을 잃은 글이 나올까봐 심히 염려 중이니 독자분께서 자체적으로 필터링하시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이 시리즈는 2017년 12월 네덜란드에 방문,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이라는 두 도시를 중심으로 실험적인 건축물 및 도시재생 사례를 탐방한 견문록입니다.
등장하는 모든 장소에 직접 방문했으며, 등장하는 모든 관계자와도 직접 대면 인터뷰했습니다. 이토록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여 작성하는 글이나, 필자의 영어 리스닝 실력 부족에 기인한 정보 오류가 존재할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요즘 '업사이클(Upcycle)'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띄곤 합니다. 언젠가 '새활용'이라는 우리 말도 생겼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트렌드로 자리잡은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업사이클의 원조 유럽에는 훌륭한 업사이클 사례들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렇다면 유럽에서도 가장 검소하기로 소문난 네덜란드는 어떤 방식으로 업사이클을 실천하고 있을까요?

아까운 감옥이 버려져 있네? 아직 80년 밖에 안됐는데... 주워다 써야겠다!
33648622.jpg 1920년대 지어져 감옥과 난민수용소 등으로 쓰이던 건물을 개조해 만든 <Lloyd Hotel>
트램이 없어졌으면 기지라도 살려야지... 110년 밖에 못 썼으니 이것도 일단 줍자!
meat-west_260915_01.jpg 1902년 지어진 암스테르담 최초의 전기트램 기지를 변형해 만든 <De Hallen>
비싼 타워크레인을 저렇게 가만히 놀려도 되는 거야? 요것도 줍줍!
17390455_1153897788065668_2459298079943759900_o.jpg 쇠락한 지역에 방치되어있던 폐 타워크레인에 만든 <Crane Hotel Faralda>

국내에서 '한 검소' 하신다는 김생민 씨 조차 명함을 내밀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그레잇 앞에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충분하지 않은, 엄청난 스케일의 업사이클링입니다. 크고작은 생활폐기물을 넘어 이렇게 거대한 폐건물을 업사이클링하는 것을 두고 재생건축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로이드호텔(Lloyd Hotel)

이번 여행에서 실제로 묵기도 했던 로이드호텔(Lloyd Hotel)은 암스테르담 중앙역 동쪽에 위치합니다. 로이드호텔의 정식 명칭은 Lloyd Hotel & cultural embassy입니다. 문화 대사관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이 호텔에는 네덜란드의 문화와 역사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1921년 지어진 이 건물은 네덜란드 특유의 좁고 높다란 형태의 건물들 여러 채를 나란히 이어놓은 듯한 모양새입니다. 당초에 이민자를 위한 숙소로 쓰이다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부터는 유태인들을 위한 난민 수용소로 사용됐습니다. 그런데 전쟁 중이던 1941년, 나치는 이 건물의 용도를 교도소로 변경합니다. 전쟁 후에도 교도소로 쓰이던 이 건물은 1965년부터 소년원으로 사용되다가 1990년부터는 예술가들을 위한 스튜디오로 쓰이기도 했지요. 이렇게 시대와 상황에 따라 수 차례 용도를 달리했던 건물은 2004년 다시 한번 변화를 거듭합니다. 지금의 로이드호텔이 탄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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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점은 바로 내부 인테리어입니다. 이 호텔에는 총 117개의 객실이 있는데, 마치 도미토리 처럼 화장실을 공유하는 형태인 1성 객실부터 그랜드피아노까지 놓여 있는 5성 객실까지 다양한 등급의 객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더 특이한 점은 117개의 모든 객실 디자인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샤워실, 약품보관실, 도서실 등 기존에 쓰이던 방의 용도의 컨셉을 유지하면서 객실로 리모델링한 이색적인 방들이 가득합니다. 감옥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객실도 있습니다. 과거의 인테리어를 훼손하지 않고, 이색적인 디자인 요소로 차용한 그 과감성이 놀랍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배정받은 방은 평범했지만, 서로 다른 일행들의 방을 구경하는 게 또 다른 재미였습니다. 특히 화장실을 통과해야만 침실이 나오는 특이한 구조들의 방이 여럿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존 교도소의 구조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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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혐오시설 중 하나인 교도소를 이렇게 유서 깊은 상징성을 지닌 컨셉추얼 호텔로 탈바꿈시키는 그 창의성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할 지경입니다. 오늘날의 로이드호텔은 역사성과 상징성을 보존하면서도 문화적·경제적 가치를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명실상부 암스테르담의 랜드마크로 인정할 만 합니다.


데 할렌(De Hallen)

암스테르담을 비롯해 유럽 주요도시들의 중요한 교통수단, 바로 '트램'입니다. 암스테르담 서쪽 지구에 위치한 데 할렌(De Hallen) 역시 최초로 전기 트램이 도입됐던 1902년 지어진 건물입니다. 원래는 최초의 전기 트램 차고지라는 역사성이 담긴 기념비적인 건물이었으나 트램의 노선이 변경되면서 제 역할을 잃은 텅 빈 차고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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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버려진 건물은 재생 건축을 통해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됩니다. 호텔 뿐 아니라 영화관, 도서관, 레스토랑, 푸드코트, 자전거 주차장 등이 위치하는 커뮤니티 센터로 변모한 것이죠. 건물들은 곧고 길게 뻗은 철길을 따라 한동 한동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텔 로비도 길쭉 길쭉, 푸드코트도 길쭉 길쭉, 특이한 구조입니다.


그런데 바닥의 철길만 그대로 보존된 것이 아닙니다. 최고 21m 높이의 지붕부터 사방의 벽까지 기존 건축물의 뼈대가 모두 고스란히 남아 있죠. 심지어 벽면을 보존하겠다며 새로이 신축하는 벽면은 기존의 벽면에 아예 닿지 조차 않도록 설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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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전기 트램 차고지라는 역사를 품고 있는 데 할렌(De Hallen)은 현재 미디어, 문화, 패션, 음식, 예술의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건물이 시민들의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인생 2막을 열었다는 점에서 이곳의 의미는 더욱 깊습니다.


파랄다 크레인 호텔(Faralda Crane Hotel)

지난 글에서 500세대 아파트 한 동을 1유로에 사들인 그 구역의 미친 X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에 맞먹는 수준의 기발함을 지닌 사람이 이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에 또 있었나봅니다. 이번에는 폐 타워크레인 위에 고공 호텔을 지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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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IJ 강변의 NDSM 지구는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를 주름 잡던 조선소 부지로, 무려 축구 경기장 10개 만큼 넓은 공간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조선업이 쇠퇴하게 되면서 이 지역이 통째로 쇠락하게 됐지요. NDSM 지구에는 열심히 물건을 나르던 산업용 타워크레인이 한 대 세워져 있었습니다만, 역시 시대의 흐름 때문에 그저 철탑 수준으로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뭐든지 재생시키는 금손을 지닌 네덜란드인들 눈에는 폐 타워크레인 조차 그냥 두기가 너무도 아까웠나봅니다. 버려진 크레인 위에 고공 호텔을 짓겠다는 미친 발상은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크레인 철골에 벽을 대어 꼭대기 3개 층을 호텔 스위트룸으로 개조했습니다. 세계의 이색 호텔에 꼭 이름을 올리는 이곳, 바로 파랄다 크레인 호텔(Faralda Crane Hotel)입니다.


90미터 높이의 와이어에서 번지점프와 비슷한 극한 그네타기(?)를 체험할 수도 있고, 50미터 높이의 야외풀에서 수영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NDSM 지구의 가이드를 맡은 네덜란드 건축전문기자 아넥 보컨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에는 방이 흔들려 스릴을 맛볼 수 있다'는 소개를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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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DSM 지구에는 파랄다 크레인 호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핫하다는 방송사, 광고회사, 영화사 등 창작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거대한 신흥 상업지구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버려졌던 여러 창고와 컨테이너들은 아티스트들의 공방으로 재탄생했고, 버려졌던 거대한 조선소 철골 위에도 오피스 빌딩이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NDSM 지구는 버려진 유산, 쇠락한 지역도 얼마든지 재생 가능하다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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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안에서의 하룻밤, 트램 차고지에서의 하룻밤, 타워크레인 위에서의 하룻밤... 그 아득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알고 있다면, 생경함이 주는 짜릿함 만큼이나 뭉클한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상 무엇이든 되살려내는 금손! 재생건축으로 탄생한 암스테르담의 호텔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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