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정 양립’을 위한 서바이벌 연대기 ⑤중소기업
반경 3km 안에 구겨 넣은 나의 삶
“다섯 살 아이의 등하원 문제 때문에 근거리 직장을 선호합니다.”
여덟 달의 경력 공백, 쉰여섯 번의 서류전형 끝에 얻은 열두 번째 면접 자리에서였다. 이번에도 눈 딱 감고 직구를 던졌다. 재삼 생각해봤지만 결국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새 직장을 구한다 해도 그 일자리를 지켜낼 도리가 없는 까닭이었다.
“정말이요? 우리 첫째와 동갑이네요.”
유일한 면접관인 대표가 반색하며 답했다. 뜻밖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문제의 등하원 노릇이 가능하게 될지를 함께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일-가정 양립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면접관과 협상하고 있다니, 전무후무한 일이다.
새 직장은 집에서 직선거리로 2.2km 떨어진 곳에 있다. 고난이도 주차를 포함해 도어투도어로 20분 소요,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면 35분 쯤 걸린다. 출근 준비에 등원 준비를 마치면 부리나케 차를 달린다. 간단한 간식을 챙겨 조수석에 앉은 아이에게 건넨다. 어쩌다 아이가 먹거리를 남긴 날은 나도 아침 요기를 하는 날이다. 물론 나의 아침식사 장소 역시 차 안이다.
오후 5시 48분, 아이가 어린이집 셔틀버스에서 내리는 시간이다. 내리는 장소는 나의 직장 앞. 다행히 직장 인근에 작은 체육관이 있어 등록시켰다. 아이는 이제 막 여섯 살이 된 최연소 수련생이었고, 월-금 주5회를 다니는 유일한 수련생이었으며, 운동을 마친 후 집이 아닌 엄마 직장으로 향하는 특이한 동선의 수련생이다.
아이 운동이 끝나는 저녁 7시, 함께 퇴근해 간단히 저녁을 차려 먹는다. 야근이 있는 날은 인근에서 같이 저녁을 사먹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아이는 주로 한쪽에서 조용히 휴대폰을 가지고 놀며 엄마의 퇴근을 기다린다.
꿈꾸던 이상과 거의 일치하는 하루 일과표다.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아이를 키우는 환경을 수년 만에 어렵사리 일구게 됐다.
고작 등원 길 차 안에서의 순삭 요깃거리라도, 비록 바깥 음식이나 냉동식품 일색인 늦은 저녁식사라도, 아침저녁 하루 두 끼를 아이와 함께할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컸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일상이지만 한 번 견뎌보기로 했다.
아이를 기르게 되면서 오직 ‘물리적 거리’라는 명료한 기준에 따라 삶의 반경을 조금씩 좁혀왔다. 동네 가족, 동네 직장, 동네 친구, 그리고 동네 어린이집과 동네 체육관... 번듯한 직장, 높은 연봉, 쾌적한 오피스, 안정적인 커리어패스, 뭐 그런 것들과 맞바꿔가며 쟁취한 나의 ‘일-가정 양립’ 모델이다.
사실 삶의 근거지를 옮기는 것도 모자라 생활 반경을 이토록 집약적으로 좁히기 위해서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들을 바꾸거나 포기해야 한다. 기존의 모든 생활양식과 관계와 가치관을 온통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뒤따랐다. 단지 직장을 바꾸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아이와의 두 끼 식사를 쟁취한 이래, 나의 삶은 압축 팩에 담긴 이불처럼 쪼그라들고 있었다.
저녁접대 NO! 저녁회식 NO! 영업 NO! 사내복지와 맞바꾼 무임금노동
새 직장은 정말이지 작디작은 회사다. 구성원이 가장 많을 때가 고작 여섯 명이었고 무려 대표와 나, 오직 둘이 전부인 시절도 있었다.
대표는 훌륭한 리더다. 일단 초 박봉이 디폴트값이라 할 수 있는 동종업계 상황을 감안하면 임금 수준이 아주 형편없진 않았다. 예기치 않게 수금이 미뤄지는 등 꽤 부담이 될 법한 상황에서도 급여 지급이 지체되는 일은 없었다. 오직 단 한 번, 월급날에 급여가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그건 성탄절과 월급날이 겹치자 하루 앞당겨 월급을 쏴주신 때였다.
좋은 프로젝트를 따내자 말없이 나와 아이의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시는가 하면, 입사 1,000일이 되는 사람에게는 해외여행을 보내주겠다 공언하시기도 했다. 저녁이면 근처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친 아이가 우리 사무실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는데, 언제나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며 간식을 챙겨주곤 하셨다.
양육자인 나에게 있어 가장 큰 복지는 뭐니 뭐니 해도 ‘저녁접대 NO, 저녁회식 NO, 영업 NO’라는 원칙이었다. 2년 반 동안 클라이언트 접대를 겸한 저녁 술자리에 참석한 일은 다섯 번이 채 안 됐다. 우리끼리의 회식은 대개 점심시간에 하거나, 일찍 시작해 저녁 6시 경 마치거나, 간혹 자녀를 동반한 채로만 했다. 영업은 거의 대표가 직접 뛰었고 클라이언트 유치에 있어 필요 이상의 압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꿈은 우리 회사를 ‘이 업계의 (당시 사내 복지가 훌륭하기로 이름 난) 제니퍼소프트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한 때는 무려 주 4.5일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갑질할 수 있는 위치에서, 규칙과 제도가 없어도 그만인 작디작은 조직에서, 매출은 널을 뛰고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신생 기업에서, 그가 이런 원칙을 스스로 세우고 꾸준히 지켜가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다.
다만 위 모든 조건을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따라야 할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 기한은 예외 없이 준수해야 하고, 업무 퀄리티는 최고로 높은 수준이어야 하며, 이 두 가지를 달성하기 위해 투입할 수밖에 없는 초과 노동에 대한 임금은 0원이어야 했다.
대다수 중소기업의 노동이 그러하듯, 나의 노동 역시 포괄임금제 안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 클라이언트가 그러하듯, 시한은 언제나 오늘 아니면 내일이었다.
선택지는 매 순간 나를 갈아 넣는 것뿐이었다. 결과로서 나를 증명하는 프로페셔널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생각했다. 오너십이, 책임감이, 정성이, 집요함이, 열정이 나를 빛내 주리라 믿었다. 돌고 돌아 어렵게 성취한 일-가정 양립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감수할 일이라고도 여겼다.
필요 이상의 오너십을 발휘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오너가 아니었다. 클라이언트에겐 다만 그들의 일을 대신하는 을에 불과했다. 나의 노동과 그에 따른 결과물로 빛나는 건 회사와 클라이언트였다. 그들이 반짝거리는 꼭 그만큼, 나는 빛을 잃어갔다.
해가 바뀌었다. 아이는 일곱 살이 됐다. 멀찍이 위치했던 대형 어린이집을 떠나 이듬해 입학 예정인 초등학교 인근의 유치원으로 옮기자 조금 난처해졌다. 유치원 셔틀버스가 내 직장 근처까지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체육관을 활용해 유예해왔던 1시간이 사라졌다.
아무리 늦어도 저녁 6시 15분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유치원을 향해 엑셀을 밟아야 가까스로 문 닫기 전에 도착했다.
‘오늘도 네가 마지막 순서구나.’
퇴근 후 아이와 함께 도착한 집, 여전히 나는 분주하다. 저녁밥을 차리고 먹이고 치우고. 놀아주고 씻겨주고 재워주고. 다른 그림자노동은 어떻게든 주말로 미뤄보지만 정리와 청소는 하루만 걸러도 개판이 된다.
드디어 맞이하는 고요한 자정. 노트북을 열고 채 끝내지 못한 잔업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새벽 두시, 세시, 어떤 날은 다섯시...
연달아 있는 노동절, 석가탄신일, 어린이날, 대통령선거 덕에 무려 11일의 샌드위치 연휴가 주어진 그해 5월에도 나의 무임금 노동은 멈출 줄을 몰랐다. 클라이언트 재촉에 급히 보고서를 만드느라 도보 5분 거리 공원에서의 두어 시간이 아이에게 내어준 전부였던 그달 5일 어린이날이 여전히 또렷하다.
야심차게 도입한 주 4.5일제는 얼마 못 가 허울이 됐다. 인력 대비 사업 규모가 끝 모르고 팽창했던 탓이다. 주 4.5일제는 업무공간만 바뀌었을 뿐 오히려 일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도돌이표 재택근무’로 전락하고 말았다.
워낙 작은 조직이다 보니 동료들이 서로의 공백을 백업할 수 있는 여지도 크지 않았다. 누군가의 공백이 한 푼 에누리도 없이 다른 누군가의 부담이 되고 마는 제로섬 구조인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그저 주어진 제 몫을 묵묵히 해내는 것은 이 작은 조직에서 갖춰야 할 유일무이한 에티켓이었고, 우리가 서로에게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동료애였다.
아슬아슬, 조마조마... 낭떠러지 외줄타기 같은 한부모의 일-생활 균형
보잘것없이 자그마한 나의 그릇에 차고 넘치는 물을 담아 머리에 이고 걷게 되었을 때부터 삶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균형 잡기’였다.
이를 이뤄내기 위해 참 어지간히도 분주하게 굴렀다. 몇 년 새 삶의 양식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 역시 시시때때로 바뀌어 왔다. 대개는 아이와의 시간이었고, 때로는 돈이었으며, 또 잠, 신뢰, 친구, 지위, 효도, 식단, 아름다움, 관계, 명성, 이상, 직업, 훈육, 위생, 교육, 양심, 꿈, 안정, 사랑, 그리고 건강...
시간이라는 궤적 안에 저 많은 요소들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다 보니 균형을 이루게 되는 순간도 더러는 찾아 왔다. 아니, 균형이라기 보단 균형 ‘감각’을 찾았다는 표현이 맞을는지도 모른다. 균형을 이뤘다고 보기에는 체념에 가까운 포기가 너무도 많았으니.
아슬아슬했다. 중심이 흐트러질 때마다 머리에 이고 있는 물이 질질 흘러 종국에는 한 방울도 남지 않게 될까봐.
조마조마했다. 낭떠러지에서 외줄 타는 마냥, 발을 헛딛자마자 즉사할까봐. 아니 뭐, 나 혼자 죽는 거면 그냥 죽겠는데 딸린 아이가 있는 관계로 생존을 위한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 대단치는 않지만 간절한 소망 하나가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면서 더 많은 고민에 닿았다. 지금의 나는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일까. 그리고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일까. 나의 그릇은 커지고 있는 걸까. 오히려 그 반대일까. 늘 마음이 소란했다.
밀도 있는 삶을 지탱하고 있는 건 나뿐이 아니었다
‘지쳤다, 고갈됐다’는 생각을 품고 하루하루 버텨온 게 얼마간인지 헤아려지지도 않았다. 피곤에 절어 먼저 잠들어 버린 어느 밤, 아이의 서러운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외로웠어? 화났어? 슬펐어? 무서웠어?” 몇 번을 물어도 대답 않던 아이는 한나절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엄마가 맨날 힘들어서”
삶의 밀도를 감당하지 못해 느끼는 감정들이 겉으로 새어나오면서 내가 앓아야 할 몫을 아이가 나눠 앓고 있다. 내색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에 조차 “엄마 또 울고 있네.”라는 말을 듣는다.
내가 다른 부모들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꼭 그만큼, 이 일곱 살배기도 또래들 보다 더 큰 역할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제 서야 보인다.
“얼른 커서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지.” 비겁하고 미숙하고 유치한 내가 아이에게 분별없이 내뱉곤 했던 말들을 주워 담고만 싶었다.
결코 함께 성립하거나 동시에 충족할 수 없는 수많은 가치들 속에 갇혀 혼란한 가운데, 단 한 가지 또렷한 것은 내 곁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주고 토닥여주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칼럼니스트 송지현은 사회생활과 잉태를 거의 동시에 시작한 ‘11년차 워킹맘’이자 그동안 다섯 번을 이직(당)한 ‘프로 경력단절러’입니다. 한부모 가정의 가장으로서 2인분의 몫을 해야 하는 ‘시간빈곤자’이나 실상은 1인분, 아니 0.5인분조차도 할까 말까 하기에 스스로를 반쪽짜리 ‘파트타임 엄마’라 칭합니다. 신문방송학 전공 후 온갖 종류의 대필을 업으로 삼아왔지만 이번 연재를 통해 처음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된 ‘생계형 글짓기 노동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