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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원에 아리스토텔레스 대신 플라톤만 있는 이유는?

by 손동혁

거리를 걷다 보면 ‘소크라테스 독서토론논술’, ‘플라톤 아카데미’ 같은 간판이 익숙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학원’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철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생각의 세계를 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생각을 삶으로 끌어온 사람인데 말이다.




아마도 이유는 ‘듣기 좋은 이름’과 ‘가르치기 쉬운 철학’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세계를 말했다. 완벽한 형태와 진리, 영원한 가치 같은 단어들이 그의 철학을 대표한다. 이런 말들은 학원 간판에 올리기에 매력적이다. ‘이상적인 사고력’, ‘완전한 논리’라는 문구는 부모와 학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그는 진리가 머릿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세계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고 보았다. 학문의 목적은 앎 그 자체가 아니라, 잘 사는 법(eudaimonia)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걷고, 토론하고, 관찰하며 세상을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움’은 책상 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몸과 감각, 공동체 속에서 자라는 과정이었다. 이 방식은 ‘체험형 학습’, ‘프로젝트형 수업’, ‘현장 교육’에 가깝다.


생각해 보면, 한국의 교육은 여전히 플라톤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적 정답’을 향해 달려간다. 입시의 목표는 완벽한 모범답안에 도달하는 것이고, 학원은 그 답을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장소다. 하지만 이런 교육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스스로 관찰하고 판단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지식은 늘 외부에서 주어지고, 학생은 그것을 흡수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식 배움은 다르다. 그는 ‘배우는 인간’(homo educandus)을 관찰하는 존재로 보았다. 배우는 사람은 직접 세계를 만나고, 그 안에서 오류를 경험하며, 자신만의 이해를 만들어간다. 완벽하지 않아도 그 과정이 바로 앎이다. 그는 지식을 삶 속에서 검증받는 것으로 여겼다. 요즘 말로 하면 ‘살아 있는 지혜(living knowledge)’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 학원’은 실은 세상 곳곳에 이미 존재한다. 카페에서 철학책을 펼치고 토론하는 모임, 마을의 골목길을 함께 걸으며 도시를 해석하는 프로그램, 지역 주민이 문제를 토론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시민 워크숍, 모두가 배움의 현장이고 그 자체로 ‘페리파토스(Peripatos)’, 즉 걷는 학교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적 배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현대의 교육이 너무 빠르고, 너무 경쟁적이며, 너무 머릿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있지만 감각이 없고, 논리는 있지만 공감이 없다. 발로 배우고, 귀로 듣고, 몸으로 생각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플라톤 학원’이 이상을 가르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학원’은 현실을 가르칠 것이다. 하나뿐인 정답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는 힘을, 책상에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세상 속의 배움을, 어쩌면 그게 진짜 교육의 시작일지 모른다.


현실을 배움으로 바꾸는 순간, 길 위의 모든 공간이 학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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