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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의 시대, 지역문화재단의 역할 재정립 방향

by 손동혁

기후 위기, 초고령화, 인구 감소, 기술 변화, 불평등 등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위기들은 환경과 경제, 경제와 문화, 문화와 복지가 긴밀하게 얽혀 하나의 구조로 작동한다. 문제의 성격이 이처럼 다층적인 만큼 행정이나 예술, 시민사회 중 어느 한 주체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한 대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해결을 위한 자원이 분산되고 주체가 다원화된 현실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사회 문제에 총체적이면서도 실질적인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영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조율하며 지속 가능한 관계망을 구축하는 새로운 협력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정책은 여전히 행정이 기획하고 지역문화재단이 이를 집행하는 기획–집행–평가의 위계적 구조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시민의 자율성과 지역의 창의성을 충분히 포용하기 어렵다. 문화는 본질적으로 관계와 맥락 속에서 형성되지만 행정 중심의 구조는 이를 제도적 틀 안에 제한하기 때문이다. 지역문화재단이 행정 기능을 대행하는 집행기관의 역할에서 벗어나 지역의 다양한 주체를 연결하고 조율하며 공공적 비전을 함께 설계하는 협력의 플랫폼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협력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각 주체의 역할이 명확해야 한다. 누가 기획하고, 누가 실행하며, 누가 평가하는지를 분명하게 정해야 참여 주체들 간의 책임과 신뢰가 형성된다. 둘째, 연결과 조율의 중심축이 존재해야 한다. 다양한 주체를 하나로 엮고, 균형 있게 조정하며, 발생하는 갈등을 조율할 수 있는 중간 조직이 있어야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지역문화재단의 역할이 결정된다. 행정, 예술가, 시민단체, 학교, 기업 등 지역 안에는 많은 자원과 주체가 존재하지만 이들 간의 관계는 여전히 느슨하고 단절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지역문화재단은 이 자원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공공의 이익을 중심으로 조정하는 거버넌스 허브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행정과 시민을 잇고, 정책과 현장을 통합하는 공적 조정자로서 기능할 때, 지역문화재단은 비로소 지역문화 생태계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축이 될 수 있다.


나아가 협력의 중심축으로서 지역문화재단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중립성과 공공성을 바탕으로 특정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않고 공공의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예술가, 공무원, 주민, 기업 등 다양한 주체의 언어와 이해관계를 번역하며 공통의 의제를 만들어내는 경청과 조율 능력이 요구된다. 또한 지역의 중장기 비전을 설계하고 협력 구조를 전략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기획력이 필요하며,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경험을 지식으로 전환하고 이를 조직의 역량으로 축적하는 학습과 혁신의 태도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지역문화재단이 행정과 시민, 예술과 정책, 제도와 현장을 매개하는 공정한 조정자이자 유능한 기획자, 신뢰받는 번역자이자 끊임없이 배우는 실천자로 자리할 때, 지역문화 협력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이 비로소 확보될 것이다.


이러한 지역문화재단의 역할 변화는 협력을 하나의 문화로 인식하는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지역문화재단이 ‘사업 수행 기관’에서 벗어나 ‘관계를 설계하는 기관’, ‘신뢰를 생산하는 기관’으로 자리할 때, 협력은 결과나 속도보다 방향과 과정에 집중하는 일이 되며 그 안에서 공동의 의미가 형성된다. 따라서 지역문화재단은 더 깊은 연결을 통해 지역의 자원과 사람, 경험을 엮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인프라로 기능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지역문화 정책은 단기적 성과가 아닌 장기적 신뢰를 기반으로 작동하게 된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다르게 상상하며, 행동하고, 시행착오로부터 배우는 과정을 끊임없이 이어가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관성을 멈추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다시 사유하고 보완하는 그 과정 속에서 지역문화의 새로운 희망이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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