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층 이하의 낮은 아파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에 갔다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상가에 들렀다. 2층에 태권도 학원이, 3층에 피아노 학원이 있다. 여름방학인데 아직 아이들은 오지 않았다. 문을 열지 않은 태권도 학원도 문을 열어둔 피아노 학원도 조용하다.
피아노학원 한번쯤 안 다녀본 아이가 드물고, 집에 피아노가 있는 게 소원인 아이들도 많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다들 바이엘이니 체르니니 하논이니, 낯선 사람들의 이름을 딴 그 교재들을 열심히도 들고 다녔었다.
노트에 1부터 10까지 쓰고 칠 때마다 동그라미를 그리라던 선생님이 나가면 치는 둥 마는 둥, 10개에 대충 동그라미 그려서 "다 쳤어요, 선생님" 천연덕스럽게 내밀었던 기억들.
아, 물론 매일매일 그런 건 아니다. 재미있어하면서 나름 오래 다니기도 했으니까.
기억 속을 더듬다 문득 제대로 살펴보니 문패 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연세대 피아노과 졸업'. 띄어쓰기도 없고, 파란 바탕에 흰 글씨만 고딕체로 써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학원'이라는 문구도 안쪽에 써 있지만, '연세대 피아노과 졸업'이라는 문패가 주연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원장 선생님의 자세한 이력과 함께, 다른 선생님의 이력도 줄줄이 붙어 있다. 연세대 피아노과에 버금가는 명문 중,고등학교부터 각종 이력이 가득하다. '우리 학원은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들을 보유하고 있고, 당신의 자녀가 학원을 다니게 된다면 이렇게 스펙 좋은 선생님들에게 배우게 된다'는 이야기를 돌려 하는 거겠지.
원생을 모으는 효과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학원을 지나가는 사람이나, 학원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문구가 '연세대 피아노과 졸업'이라는 건 좀 쓸쓸하다.
언제부터인가 태권도 학원도, 미술학원도, 피아노 학원도 입시학원들처럼 원장이나 선생님들의 출신 학교를 명기하거나 아예 학원 명으로 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 학원은 그나마 이름에는 학교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니 그나마 좀 낫다고 해야 하는 걸까?
작은 문패 앞에서 생각이 많아진 오전이다.